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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42
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본보 논설주간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 d3388100@hanmail.net입력 : 2024년 02월 28일(수)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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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새해 복 많이 짓고, 많이 받으소서.” 양력으로는 벌써 2월 중순이다. 그렇지만 우리 고유의 풍습에 따라 정월의 달에는 첫 만남에는 서로 새해인사를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복을 짓고 받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속의 일이다. 올 한해 모든 이들이 서로의 복전(福田)이 되어주고 그 복 밭에 복의 씨앗을 뿌리는 날들이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禹在龍 義士 略歷(우재룡 의사 약력) ⑥
독립유공자 공적조서②
서울에서 일본군과 일전 벌인다는 목표로 청하, 월연동에서 일본군 격파
군대해산으로 참여한 군인들이 가져온 근대적 무기는 의병의 무장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군인들은 유격전을 비롯한 전술을 향상시켰으며 의병들을 훈련시켜 전투력을 크게 키웠다. 선생은 ‘연습장’을 맡아 의병들에게 군대 경험을 전수했다. 선생의 첫 출병은 의진에 참여한지 며칠 되지 않는 1907년 7월 12일이었다. 산남의진은 관동지역으로의 북상을 위해 영해방면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첫 전투는 청하(淸河)전투였다. 산남의진은 7월 17일(양력 8월 25일) 의병 300여명과 함께 청하읍을 공격해 분파소를 소각하고 한인순사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의진은 청하에서 획득한 무기를 천령(泉嶺)에 감추고 8월 초 청송(靑松)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장마로 청송 공격은 실패하고 다시 신령(新嶺)으로 이동했다. 백산실기에 의하면 신령에 도착한 산남의진은 일본군이 영천에서 청송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렸으나 일본군이 오지 않아 전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안동과 의성을 거쳐 신령에서 매복해 8월 14일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회오리 바람을 동반한 소낙비가 내려 일본군을 퇴각시키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산남의진이 이와 같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의 이동상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과 산악지대를 이용한 유격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8월 24일 일본군이 영천에서 자양으로 이동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의진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1개 부대는 노항동(魯巷洞), 다른 부대는 검단동(檢丹洞)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선생은 선봉을 맡아 월연동(月淵洞)에서 포위된 일본군을 공격해 그 중 한 명을 참수했다.
산남의진은 보현산(普賢山) 주위 마을에 주둔하면서 북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용기 대장은 일본군이 입암(立巖, 현 영일군 죽장면)에 유숙할 것을 예상하고, 의병장들에게 매복을 지시했다. 선생은 본진이 입암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퇴로를 막아 모두 섬멸하기 위해 매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9월 1일 저녁 일본군이 입암에 들어와 유숙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용기는 작전대로 본대는 어둠이 걷히는 새벽을 이용해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선생을 비롯해 김일언, 이세기는 퇴로 차단을 위해 매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매복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가 벌어졌다. 매복하기로 했던 이세기가 먼저 입암을 공격한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자 본진이 입암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입암전투의 패배는 산남의진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의진의 피해는 너무나 컸다. 대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이 전사하고 입암은 초토화되었다. 대장을 비롯해 지휘부를 구성했던 의병장들이 전사하면서 산남의진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선생은 산남의진이 해산의 위기에 처하자 선봉장이 되어 직접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정순기와 함께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진을 재편성했다. 재봉기한 산남의진은 청송의 보현산(普賢山)과 영일군 동대산(東大山) 일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청하분파소, 흥해분파소 등을 공격했으며, 영덕읍을 공격해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경북지역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정환직은 군수품이 부족하고 일본군의 기습이 잦아지자 의병장들을 각지에 파견해 유격대와 군수품을 조달해 각기 강원도로 북상할 것을 지시했다. 정환직이 북상을 지시한 것은 본래 봉기 목적인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기 위함이었으며, 자신이 먼저 북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환직은 강원도로 북상 도중 청하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이때 창녕지역에서 군수품 모집을 하던 중 정환직의 체포 소식을 듣고 이세기 등과 함께 정환직 구출 작전을 시도했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정환직은 1907년 12월 7일 영암에서 일본군에 의해 순국했다. 산남의진은 또다시 대장을 잃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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