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엄청난 장맛비와 장기간의 불볕더위를 맛보는 드문 한해다. 그리고 다시 태풍의 피해를 걱정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우주의 주인인 양 으스대지만 100년 안팎의 짧은 시간 머물면서 온갖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사라지고 마는 존재. 거대한 자연의 섭리를 접하면서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 나를 살피는 일이려니 한다.이두규자는 형칠이고, 본관은 벽진으로 경은선생의 후예이고, 대대로 영천에서 살았다. 성품이 과감하여 산남의진이 창의한 초기에 각 지역에서 비밀스런 모의를 함에 어려움과 험난함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서기 1906년과 1907년 사이에 장영집사가 되어 백방으로 주선함에 자못 그 명성과 칭송이 자자하였다. 급기야 앞뒤의 일이 실패하자 죽기로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우재룡을 따라 대구 등지에 잠복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또 팔공산의 큰 패배가 있어 의로운 싸움을 함께 도모하던 동지들이 거의 전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붙잡혔다. 사건이 전말(顚末)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 또한 적에게 사로잡혀 몇 년을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한을 머금고 죽었다.<山南倡義誌 卷下45p>〈원문〉李斗圭는 字亨七이요 碧珍人이라 耕隱先生之后라 世居永川하다 性果敢하야 起倡之初에 各地通謀을 不避艱險하고 丙子之間에 爲將營執事하야 百方周旋에 頗有名稱이런이 及前後事敗에 誓死復하고 從禹在龍하야 潛伏於大邱等地하야 武器求募之中에 又有八公山之大敗하야 同謀同志가 擧皆戰死하고 餘皆被執하니 事至顚末하고 未幾에 身亦被執하야 數年繫獄而歸하야 飮恨而卒하다李斗圭 義士 略歷(이두규 의사 약력)李斗圭(이두규)는 字(자)는 亨七(형칠)이요 관향은 碧珍(벽진)이며 耕隱先生(경은선생)의 后(후)라 永川(영천)에 世居(세거)하였으며 성품이 果敢(과감)하다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처음 일어날 때 公(공)은 남 먼저 들어와서 각지를 연락하였고 특히 永川地方(영천지방)을 담당하여 召募(소모)하였으며 行陣(행진)할 때 將營執事(장영집사) 또는 軍門執事(군문집사)등의 要職(요직)에 책임을 지고 數年(수년)간 內部(내부)에 활약하였다. 鄭大將(정대장) 父子(부자) 殉國(순국)하고 崔大將(최대장)을 도와서 활약을 계속하다가 崔大將(최대장)이 被擒(피금)되고 禹在龍(우재룡)을 따라서 大邱(대구)등지에 들어와서 무기를 구입하고 人員(인원)을 모집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大事(대사)가 顚末(전말)되는데 四五名(사오명)의 同志(동지)는 桐華寺(동화사)에서 순절하고 그 다음은 大邱(대구) 某處(모처)에서 모두 被擒(피금)되어 公(공)은 十年(십년) 언도를 받고 服役(복역)하다가 出獄(출옥)되어 光復(광복)을 못보고 많은 恨(한)을 남겨두고 저 세상으로 떠나다. <山南義陣遺史497p>이두규 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1906년경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될 당시 영천지방을 담당하여 의병모집에 매진했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 그리고 최세윤(崔世允) 등과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조직한 의병부대이다. 이들은 영천‧경주(慶州)‧청하(淸河)‧청송(靑松)에서 활동하였다. 의병부대 조직 후에는 군문집사(軍門執事) 및 장영집사(將營執事)를 맡아 활약하였다. 정환직 부자가 순국하여 최세윤이 의진 대장에 취임한 후에도 그를 도와 의병 활동을 지속했다. 이들은 청송 지역을 중심으로 경주‧울산‧흥해‧포항 등에서 소부대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 끝에 대구에서 체포되었다. 정부는 202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4-10-10 04:52:27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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