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처럼 뜨거운 추석연휴를 보냈는데 장마철에나 봄직한 큰비가 지나가더니 하룻밤 새 가을 날씨로 변했다. 너무 빠른 탓도 있겠거니와 나라경제의 어려움이 서민들의 삶 곳곳에 미쳐 그리 풍성하지 못한 씁쓸한 명절이라 느낀 것은 이제 갈 곳이 만만치 못한 나만의 기분일까. 하늘이나 인간세상이나 궁(窮)하기는 마찬가지인 게지.장성우자는 경안이고, 본관은 옥산으로, 대대로 인동에서 살아왔다. 천부의 성품이 단정하고 우아하며 문학과 훌륭한 행실이 있었다. 1907년 9월 뜻을 함께하는 사람 수십 명과 함께 산남의진에 들어왔는데, 동엄공이 매우 가상하게 여겨 장영집사로 삼았다. 급기야 큰일(大事)이 실패한 뒤 호남과 영남지방의 사이에 자취를 감추고 바다 밖 동지들과 연통하여 일을 도모하다가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시종일관 굽히지 아니하고 감옥에 갇힌 지 몇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원문〉 張性愚는 字敬安이요 玉山人이라 世居仁同하다 性이 端雅有文行하다 丁未九月에 與同志數十人으로 入陣하니 東公이 甚嘉之하야 爲將營執事하다 及大事敗後에 潛跡於湖嶺之間하야 爲海外同志之通謀타가 被執於敵하야 終始不屈하고 繫獄數年吏歸하야 因病不起而卒하다<山南倡義誌 卷下46p> 張性愚 義士 略歷(장성우 의사 약력)張性愚(장성우)는 字(자)는 敬安(경안)이요 貫鄕(관향)은 玉山(옥산)이라 처음에 仁同(인동) 漆谷(칠곡)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丁未九月(정미구월)에 同志數十人(동지수십인)을 더불고 入陣(입진)하여 將營執事(장영집사)로 활약하고 후에 은신하다 <山南義陣遺史468p>이규환처음 이름[初名]은 천만이며 본관은 월성으로,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두터웠다. 산남의진의 우영장으로서 적과 대치함에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그러나 두방의 전투에서 하늘이 어긋난 이상 징후와 나라가 망할 운수를 보였다. 10월 2일인데 바람과 번갯불이 진동하면서 이틀 내내 비가 와서 조선식 화승총을 사용할 수가 없는 데다, 하물며 또한 군중의 화약이 떨어져 싸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적이 아군의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보고 포위하여 장영(將營)이 매우 위태롭기에 김성극, 박광과 더불어 위엄을 뿜고 몸을 뽑아 올려 대장을 호위하여 적의 포위를 무너뜨리고 탈출하였다. 규환은 앞뒤의 참혹한 패배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죽기로 복수를 맹세하였다. 그러나 광천(廣川)의 전투에서 오른쪽 넓적다리에 적의 총탄을 맞고 동지들의 도움으로 거동(巨洞)1)에 사는 원사문의 집에서 석 달 간에 걸쳐 치료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처자식을 데리고 만주로 떠나갔다. 〈원문〉 李圭桓은 初名은 千萬이요 月城人이라 性이 淳厚하다 爲右營하야 與敵對峙에 一無所失이런이 至斗坊之戰하야 天之乖候亦國之亡運이라 時十月初二日也에 雷風電雨二日連續하야 朝鮮火繩之銃은 不可使用하고 況又軍中火藥이 乏絶하야 至不戰自敗之境이라 敵見我陣虛勢하고 圍將營甚急이어늘 與金聖極朴匡으로 奮威踊躍하야 護衛大將而潰圍脫出하다 及前後慘敗에 與同志로 誓死復라가 至廣川戰하야 右肱에 中敵彈하고 得同志之護而至巨洞元士文家하야 治療三日而蘇生하야 歸故鄕하야 率妻子客於滿洲하다 <山南倡義誌 卷下46~47p> 李圭桓 義士 略歷(이규환 의사 약력)李圭桓(이규환)은 初名(초명)은 千萬(천만)이요 관향은 月城(월성)이라 將營守衛壯士(장영수위장사)로 있었고 右營將(우영장)으로 활약하더니 滿洲(만주)로 피신하다<山南義陣遺史4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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