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에서 산남의진 3대 대장 최세윤 선생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리고 강봉학 선생은 경북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산남의진 참진 의사로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분은 현재 132분이다. 산남의진의 규모와 그 역할을 짐작케하는 숫자다. 그럼에도 여전히 산남의진은 경상북도 도민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우리 지역의 역사와 인물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안타깝다. 짙어가는 가을, 산남의진을 제대로 선양할 계기가 어서 빨리 왔으면 하는 상념에 젖는다.安守元 義士 略歷(안수원 의사 약력) ②戊申二月中旬(무신 이월 중순)에 청하 보경사 등지에서 왜적들과 접전되어 여러 시간 교전하다가 우리는 탄약이 핍절되어 큰 실패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또 그달 그믐에 본부에 원조를 청하고 본 분대의 힌을 다하여 흥해에 주둔하는 왜적들을 진격하다가 또 참패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삼월(3월) 초순에 雲住山(운주산)부대의 원조를 청하고 본부의 지휘를 받아서 흥해읍을 진격하다가 북송림에서 왜적들과 교전되어 또 무참하게 참패를 당하고 비학산으로 돌아오다. 이 뒤로부터 왜적들은 大邱以下(대구 이하) 각 군의 병력을 총집합하여 비학산을 포위하고 소탕전을 전개한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도 탈출할 변통을 못 이루었다. 제일 큰 문제는 탄약이 핍절되어 교전을 할 수 없고 그 다음은 포위망 속에 들어서 각지에 연락이 안 되는지라 단 본부 응원을 얻어서 싸우다가 戊申三月十六日(무신 3월16일) 덕동 송림에서 전군이 거의 몰살을 당하고 公(공)도 중상을 입고 할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公(공)은 미리 군기서책을 뜯어 물에 침수시키고 피금되었다. 처음에 청하옥에 감금되어 옥문을 부수고 나오다가 발각되어 뭇매를 맞고 三日(삼일) 후에 다시 살아났다. 그뒤부터는 力士(역사)라고 인정을 받고 철사로서 전신을 꽁꽁 묶이었다. 그렇게해서 마차에 태워 흥해읍을 지나갈 새 公(공)은 마차 위에서 묵묵한 태도로 무언전송을 하는 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답사하기를 “나는 한국의 의사 安守元(안수원)이다. 이번에 가면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데, 슬프다 우리 동포들이여 왜놈들의 종이 되었구나.”하고 눈물을 뿌리니 모두 통곡하더라. 언양 땅을 지나갈때에 마차 위에서 왜적의 환도를 탈취하여 적을 겨누다가 그 곁에 公(공)의 늙으신 父母(부모)와 어린 자식들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던지고 통곡하니 적들도 이러한 광경을 보고는 차마 어찌하지를 못하더라. 적들이 만단 회유책을 이용하여 항복하기를 권유하는 것을 종시 듣지 않고 경주에 투옥되었다가 울산 부산 등 十二(십이) 군옥을 경유하여 안동옥에서 병세가 위독하게 되는 것을 보고 적들이 가석방을 시켜주었다. 거기서 출옥되어 그 동안에 겪어온 옥고 여독이 크게 발작되어 많은 한을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나니 때는 戊申八月十八日(무신 8월18일)일러라 <山南義陣遺史356~35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