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산 자락 거동사 옆 계곡에 야철지(冶鐵址)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데 이곳이 산남의진 의 화승총 화승을 만들었던 유허일까, 김용본 의사의 야철장이었을까?이종곤자는 태경이고 호는 춘오이며 본관은 월성으로, 정언(正言) 규일의 아들이다. 평소 뜻이 크고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다. 1906년 병오년 창의에 맨 먼저 통모(通謀)하여 처음에는 부총장이 되었다가 그 후 1907년 정미 가을에는 소모장을 맡았다. 입암전투에서 죽음을 면하고 그 후 김성일과 더불어 일을 도모하였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후에 시와 술로 이곳저곳을 방랑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종곤을 광객(狂客)1)이라 불렀다.〈원문〉李鍾崑은 字台卿이요 號春塢요 月城人이라 正言圭日之子也라 性이 素倜儻慷慨하다 丙午에 首先通謀하야 初爲副摠將하고 丁未之秋에 任之以召募將하다 立巖之敗에 免於難하야 後與金聖一노 圖事하다가 境不利하고 後放浪於詩酒하니 世稱狂客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0p>李鍾崑 義士 略歷(이종곤 의사 약력)李鍾崑(이종곤)은 字(자)는 台卿(태경)이요 관향은 月城(월성)이라 처음에 杞溪(기계)지방을 책임지고 소모하였고 후에 入陣(입진)하여 都總將(도총장)으로 활약하다가 후에 은신하여 詩酒(시주)로 방랑하고 狂客(광객)으로 自處(자처)하다 <山南義陣遺史469~470p>김용본자는 원서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었다. 1858년 무오에 충청도 관재곡에서 태어나 청송에 우거(寓居)하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국채보상을 위한 단연회 때에 이르러 고을에서 솔선수범하여 참여하였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운동 탓으로 각 지역을 피난 다니다가 대세(大勢)가 날로 그릇되자 크게 울분을 참지 못했다. 처음 김현기의 의병진으로 들어갔으나 현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싸움에 져서 죽자 다시 영해 신태호의 의병진으로 갔다. 그러나 태호가 예우하지 않자 용본은 칼을 짚고 산남의진으로 들어와 지포 이한구의 신임을 얻었다. 도총장이 되어 복병으로 주왕산을 따라 청송읍을 함락시키려 했지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합해지지 않았기에 청송을 함락하려는 계획을 중지하고 말았다. 입암 등지의 산남의진 일이 실패로 거듭되자 마침내 몸을 산골짜기에 숨기고 쇠를 다루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용본을 아는 사람이 없어 화는 면했지만 오래지 않아 죽었다.〈원문〉金用本은 字元瑞요 光山人이라 性이 豪俠하다 戊午에 生于忠淸道冠才谷하고 寓居靑松하야 爲兵曹佐郎하다 至國債報償斷煙會之時하야 爲鄕黨率先垂範하다 自甲午東亂으로 避難於各地라가 見大勢日非하고 不勝憤鬱之氣하야 始入金顯基陣하니 顯基尋에 敗死하고 復歸申泰浩하니 泰浩不禮之故로 杖劒歸山南陣하야 爲芝圃李公之所信任하야 爲都摠將하야 以伏兵으로 從周王山하야 欲陷靑松邑이라가 衆心不合故로 乃止하다 事敗之後에 遂隱身於山谷하야 以治鐵노 爲生業하니 世無知者라 以是免禍하고 未幾而卒하다 <山南倡義誌 卷下50~51p>金用本 義士 略歷(김용본 의사 약력)金用本(김용본)은 字(자)는 元瑞(원서)이요 관향은 光山(광산)이라 관직은 兵曹左郞(병조좌랑)이라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都總將(도총장)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冶鐵工(야철공)으로 생업하고 피신하다 <山南義陣遺史4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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