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산 166번지에 가면 조선조 명재상이었던 약포 정탁(1526~1605)의 묘가 있고 산자락 우측 아래에는 재실이 있다. 이곳은 마을 중앙으로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양쪽이 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묘소가 있는 곳은 행정구역상 안동시 풍산읍에 속하고, 재실은 예천군 호명면에 속한다. 그는 원래 예천 출생이었으나 어린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따라 안동시 와룡면으로 이사를 와 17세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갔다. 1552년(명종 7) 생원시를 거쳐 1558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6조 중 5조의 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선조 36년 사직을하고 향리인 예천으로 돌아와 보문면 고평동에 은거를 하였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에 봉해졌고 선조 38년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향현사와 도정서원에 제향되었다. 정탁은 서애 류성룡과 함께 이황의 제자로 임란을 전후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92년 왜군들이 쳐들어오자 류성룡은 선조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고 정탁은 세자(광해군)를 따르며 보필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이 류성룡이라면 그가 모함을 받아 죽음 직전에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정탁이었다. 또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작전 참모인 두사충의 실수로 패전을 하게 되자 이여송이 그를 참하려 하였는데 정탁이 ‘신하를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고 하여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두사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감여요람(堪與要覽)」이라는 풍수서를 지어 정탁에게 주었는데 이 책은 지금도 고평리 그의 유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책에는 예천지방의 명당 10곳을 찾아 적어 놓았고 약포의 신후지지(身後之地)도 연주패옥형(連珠佩玉形)의 명당 터를 정해 주었으나 자식에게 알리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훗날 소문이 퍼졌고 전국의 내로라하는 풍수사들이 그 자리를 찾기 위해 예천지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1곳만 밝혀내고 9곳은 아직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이곳의 산세는 안동시 북후면 학가산(870m)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내려온 지맥이 예천군 보문면의 보문산(642.6m)을 지나 호명읍 본리에서 340m의 봉우리를 일으켜 이 묘소의 주산이 되었다. 주산에서 다시 남쪽,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지현굴곡(之玄屈曲)으로 내려와 혈장 뒤에서 과협을 한 후 비룡 입수하여 나지막한 돌형의 혈장을 만들었다. 이러한 지현굴곡과 혈장 뒤의 과협은 앞쪽에 혈이 맺혀 있음을 증명해 준다. 돌혈은 그 특성상 산곡에서는 바람의 피해가 예상되지만 이곳의 혈장은 나름대로 좌우의 청룡과 백호를 갖추었기에 장풍(藏風)에는 큰 문제가 없다. 안산은 외청룡 끝자락이 그 역할을 해 주지만 혈장과의 거리감이 있고 수구가 넓은 것이 이 묘소의 흠결이다. 수세는 좌우 용·호 자락 안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혈장 앞에서 만나 좌선으로 내성천에 흘러든다. 또한 주산(절고개) 좌측 뒤쪽 행갈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혈장 뒤 현무봉을 완전히 감싸면서 우측으로 흘러나가니 본 혈장의 공배수(拱背水)가 되어 생기 누설을 방지해준다.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남서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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