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산 6번지에 가면 조선조 문신인 이말정(李末丁: 1422~1474)의 묘소가 있다. 그는 연안(延安)이씨로 시호는 평정공(平靜公)이고 연성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일찍이 평절공(平節公) 한옹(韓雍)의 사위가 되어 그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고 1426(세종 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검교(檢校), 충청도사(忠淸都事) 그리고 종3품의 예빈소윤(禮賓小尹)에 이르렀다. 그는 훗날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인 김천시 구성면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으나 얼마 후 거창으로 이사를 하였고 그곳에서 정원에 매화를 심고 반석(盤石)에 앉아 다섯 아들과 학문을 논하였으니 주변에선 그 바위를 오자암(五子岩)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의 다섯 아들은 숙황(문과급제-성균관 직강), 숙형(문과급제-현감), 숙규(문과급제-감찰), 숙기(무과급제-廷安君) 숙함(문과급제-이조참판) 등으로 5형제 모두가 급제하였다. 이처럼 다섯 아들들이 모두 다 훌륭하게 자란 배경에는 부모님의 묘자리가 명당 터 때문이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내용인즉, 1446년 이말정의 처 곡산한씨가 죽어 장례를 치르고자 묏자리를 찾던 중 상갓집 앞을 지나는 스님의 흘린 말을 듣고 따라가 대덕산 아래에서 쉬고 있는 스님을 만나 묏자리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정성에 발걸음을 돌린 스님은 상원마을 뒤 매봉산 자락을 지목하며 땅을 파면 석함이 나올 것인데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부의 실수로 석함이 열렸고, 그 속에서 벌 두 마리가 나와 날아갔다. 이를 본 스님은 아쉬워하면서도 발복이 미뤄지기는 하겠지만 후손 중에 많은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스님의 말대로 이말정의 아들 5형제는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후 후손들은 구군팔판(九君八判)과 3대에 걸친 대제학을 비롯하여 7명의 청백리가 배출되었다. 이곳의 묘소는 이말정의 묘소가 아래쪽에 있고 그의 후손들이 위쪽에 있어 역장(逆葬)의 모습이나 조선조에는 이러한 일이 허다하였고, 오히려 역장 덕분으로 명당이 아니다 하여 파묘를 당하는 화를 면했다고 한다.이 묘역의 산세는 백두대간의 줄기인 충북 영동군의 황악산(1,120m)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이 김천시 구성면의 삼악산(490m)을 일으키고 여기서 남쪽으로 계속 뻗어 내려와 이 묘소의 주산인 안산(324.3m) 을 일으켰다. 여기서 동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혈장 뒤 금형의 현무봉(응봉산)을 일으키고 계속 뻗어 내려와 끝자락인 용진처에 혈장을 만들었다. 이곳의 수세는 좌선룡에 우선수로 합법하고 좌우용·호와 더불어 사신사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장풍국(藏風局)을 이루고 있다. 이 묘역은 형국론으로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인 금채낙지형(金釵落地形)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고, 일부에서는 뱀이 기어가는 사두혈(蛇頭穴)로 보기도 한다. 혈장 앞 감천 너머로 보이는 문필봉의 안산은 금비녀에 어울리는 옥소(玉梳/머리빗) 모양으로 금채형의 형국과 짝을 이루니 형국의 완성도를 이루어주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곳의 혈장을 조선의 8대 명당 중 한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