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23)간간히 나무사이로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는 세상을 향한 간곡한 외침처럼, 희망의 불씨를 배달하고 있었다. 더구나 숲속에서 생성하는 피톤치드로 인해 편안한 여정이 보장되어 설득력 있는 보폭이 옮겨진다고 믿어졌다. 그런 이유일까. 아무도 없는 숲속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먼지와 소음이 없는 안정감이, 피톤치드가 제공하는 이상으로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깡마른 여자는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았고, 달빛에 적셔진 편백나무가 성장판을 건드리며 곧게 자라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삐꺽삐꺽 쩌억쩌억, 가지 끝은 새롭고 놀라웠다. 저 소리들을 한낮에는 감추어두었구나. 분명 깊이 숨겨둔 나이테에 타원형 동그라미가 들어서는 소리일 게다. 빽빽하게 운집하여 경쟁하듯 자라나는 경이로움이 하늘을 향해 숨 가쁜 모습으로 변신을 꾀한다면, 이 시간은 편백나무에게 바쁜 노동의 순간일 것이다. 빠르게 북상하는 어둠이 차마 숲속을 뒤죽박죽 망치지 않은 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더 걸으면 숲속의 끝이 나올지 알 수 없지만 깡마른 여자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서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졌다. 자신을 위해 누군가 마중 나와 있진 않지만, 낙엽을 밟고 있는 예사롭지 않는 감촉으로 충분히 행복해졌다. 얼마쯤 갔을까. 꽤나 높은 편백나무에 방패연이 걸려있었다. 발견한 것만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구멍처럼 반짝거렸다. 우로지 어디쯤에서 자신만만하게 연줄을 풀어 창공에 띄웠을 것이다. 얼레에서 풀려나는 실은 방패연을 팽팽하게 지탱해주며 바람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뭇 뜨겁고 몸부림치는 어느 시점에서 얼레와 방패연은 분리되었을 것이다. 아빠에게 떼를 써서 얼레를 잡은 초등학생이거나, 추억을 되살리려는 중년의 누구이든 간에, 방패연을 놓친 아쉬움은 큼지막했을 것이다. 얼레에서 달아난 방패연을 쫒아 바람의 방향 따라 숲속으로 들어와 찾을 것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가지 끝에 걸린 방패연을 보고서 낙담도 절망도 사치로 여기고 돌아서고 말 것이다. 저 숲이 주는 오래 앓는 기침소리와 둥글둥글 생살이 돋아나는 세상사를 보며 한 겹 허물도 벗어놓았을 것 같았다. 방패연은 간혹 흔들리기도 하고 금이 가기도 하고 찢어지기도 하며, 도망칠 곳이 없는 가난한 마음 그 자체였다. 깡마른 여자는 물풀 냄새를 맡았다. 멀지 않는 곳에서 개울물소리도 들렸다. 뾰족했던 마음이 얼룩을 벗겨내고 수십 년 더 살아온 사람처럼 온순해졌다. 그러고 보니 숲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기다리면서 안부를 물어온 것도 같았다. 저기가 끝일까. 숲이 좁아지면서 숲길도 옅어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깊은 숨을 몰아쉬었고, 참을 수 없는 온기에 자신의 젖가슴을 만졌다. 그러면서 눈물이 고였다. 출산은 해보지 않았지만 젖꼭지 주변 몽우리에서 확산하는 젖 돌기 같은 느낌이라 단정했다. 젖가슴을 만지며 숲의 끝에서 돌아섰고, 젖가슴을 만지며 아쉬운 듯 돌아선 숲의 끝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시 올 수 있을까. 깡마른 여자는 다시 올 수 있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첫걸음이기에 눈도 코도 모르고 나섰지만 두 번째는 반드시 숲길이 견고한 함정들로 득시글거릴 것이 분명해질 거라 믿었다. 남극의 초대형 빙하가 예상보다 빠르게 녹고 있다는 기사를 떠올리며 혼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빙하의 붕괴로 지구의 재앙과 종말이 도래되면 이 숲도 바닷물의 침입으로 광범위하게 수세기가 아니라 수십 년 사이에 엄청난 피해가 몰아칠 것이다. 어제의 숲은 빙하가 녹은 바닷물이 들어차 붕괴의 수순을 밟을 것이다.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깡마른 여자 앞에 낯선 생명체가 앞을 가로 막았다. 화들짝 놀라서 무릎을 세게 나뭇등걸에 부딪혔다. 곧 넘어지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