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 285-1에 가면 ‘명주군왕릉’이란 입석 안내판이 있다. 이 묘소의 주인공은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이고 그가 군왕으로 불러 지게 된 경위가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그는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혜공왕 13년(777) 이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었고, 선덕왕 1년(780)에는 군을 총괄하는 병부령을 지내는 등 막강한 권력자였다. 785년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통을 잇기 위해 궁궐에서는 화백회의가 열렸고 당시 태자 책봉 1순위였던 김주원도 당연히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갑작스런 홍수로 인해 경주 북쪽의 알천이 범람하여 개울을 건널 수가 없어 불참을 하게된다. 귀족(화백)들은 이는 하늘의 뜻이라며 왕위는 당시 상대등(上大等)이며 화백회의 의장이었던 김경신에게 넘어갔고 그가 곧 신라 제38대 원성왕이다. 그런 후 김주원은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인지 외가인 명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원성왕은 오히려 그에게 동해안 일대의 명주 관하 9군과 25현을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명주군왕으로 봉해 다스리도록 했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 헌창과 손자 범문이 중앙정부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를 따랐던 무리들이 239명이나 처형을 당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규모가 제법 큰 반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묘는 원래 신라시대의 묘가 아니고, 실전(失傳)되었다가 조선 명종 때 강릉부사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후손 김첨경이 찾아 복원한 것이다. 묘는 상하 두기로 모셔져 있는데 아래쪽이 김주원의 묘소이고, 위쪽은 부인의 묘소라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이 없다. 비석에는 ‘명주군왕 김주원 지묘’라고 새겨져 있고 후손들은 매년 음력 4월 20일 명주군왕제를 올리고 있다.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의 곤신봉(1,131m)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간 지맥이 시계방향으로 감싸면서 대궁산(1008.3m)을 지나 완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 묘소에 이른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형국을 회룡고조(回龍顧祖) 형국이라 하고 형국의 조건만 잘 갖추어지면 발복이 크고 오래 지속되는 좋은 혈처로 평가한다. 회룡고조혈의 특성상 좌우 청백 중 하나는 갖출 수가 없지만, 이곳은 마지막 용진처에서 지맥이 갈라져 한쪽 자락은 본 혈장의 내청룡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그리고 백호 자락이 혈장의 앞면부터 우측을 돌아 혈장의 뒤쪽까지 완전히 감싸주고, 마지막은 혈장 좌측의 내청룡 자락으로 묘역을 감싸주니 혈장 앞쪽의 수구가 좁아져 안쪽은 늘 생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내청룡 자락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 보니 본 혈장의 당판이 좀 협소하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선 보기에는 혈장과 우백호 사이의 계곡이 깊어 바람의 피해가 예상되나 실제 혈장에 올라 보면 주변 산들의 짜임새가 좋아 바람은 거의 없고 햇볕이 양명하여 누구나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전체적인 국세로 보아 주변 산세들이 모란꽃잎과 같이 겹겹이 겹쳐져 있다하여 일부에서는 이곳을 모란반계형의 명당 터로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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