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바라밀의 두 번째는 지계(持戒)입니다. 지계바라밀은 계율을 지키고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제어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기 관리가 아니라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보살의 적극적 실천 의지와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계(戒)와 함께 쓰이는 글자가 율(律)입니다. 계(戒)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조정하는 종교적·도덕적 규범인데 비해, 율(律)은 출가 교단을 통제하기 위한 규범입니다. 이는 교단이 자치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므로 재가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오계(五戒)인데, 모든 불자는 먼저 이 오계를 받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해야만 합니다. ①불살생(不殺生)-목숨을 빼앗는 것의 금지 ②불투도(不偸盜)-남이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의 금지 ③불사음(不邪婬)-간음하는 것의 금지 ④불망어(不妄語)-거짓을 말하는 것의 금지 ⑤불음주(不飮酒)-술이나 마약에 취하는 것의 금지입니다.거기에 팔계(八戒)는 ⑥불비시식계(不非時食戒)-때가 아니면 음식을 먹는 것의 금지 ⑦부도식향만계(不塗飾香鬘戒)-장식물로 몸을 치장하고 향수를 쓰는 것의 금지 ⑧부좌고광대상계(不坐高廣大床戒)-높고 큰 평상에 앉는 것의 금지입니다. 그리고 십계(十戒)에는 ⑨불가무관청계(不歌舞觀廳戒)-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거나 듣는, 즉 세속적인 오락에 빠지는 것의 금지 ⑩불측금은보계(不蓄金銀寶戒)-금이나 은을 취하는 것의 금지를 더 보탭니다. 8계까지는 재가자의 수행을 돕기 위해 정해진 것이고 10계는 출가한 어린 수행자가 지켜야 할 지침입니다. 그리고 비구는 이 10계에다 240가지의 율법을 보태서 250계를, 비구니는 348계를 지켜야 한답니다. 또한 이 모든 계율을 통털어서 삼취정계(三聚淨戒)라 하는데 섭율의계(攝律儀戒-모든 계율을 지키리라), 섭선법계(攝善法戒-모든 선을 행하리라), 섭중생계(攝衆生戒-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의 세 가지입니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보살도를 실천하고자 하는 불자의 기본이 되는 의식이 바로 삼취정계입니다.일반인이 정식 불교도가 되기 위해 5계나 8재계를 받게 되면 계사(戒師-계를 일러주는 스님)께서 계의 조목을 하나씩 설하고 나서 “지키겠는가? 말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수계(受戒)가 스스로 자유의지로 받아 지니는 것임을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계를 받아놓고 안 지키면 부처님께 벌 받는 것은 아닐까?’라는 어리석은 생각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계(受戒)는 오직 자신의 올바른 삶을 만들어가기 위한 스스로와의 약속을 다지는 행위입니다. 혹시 어쩔 수 없이 어기는 상황이 오더라도 반성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지키려는 의지를 일으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계는 한번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반복해서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지계의 항목이 육바라밀의 하나인 것은 계의 항목들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행을 함에 있어서 가장 지름길이 되는 까닭입니다. 이상적인 지계바라밀은 모든 조목이 체화(體化)되어 지켜야지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도 의식과 행위가 저절로 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겠지요?국가보훈부에서는 2026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산남의진에서 활약한 이한구(중군장)·손영각(참모장)·최산두(최세윤 대장의 장남) 의사를 선정했고, 훈련장과 유격장으로 활약한 손진구 의사는 경북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임중호의사 공훈록경북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영덕(盈德)에서 김재서(金在瑞) 등과 더불어 창의군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으로 추대된 후 청하(淸河)·영덕 강구(江口) 등지에서 일본군의 주둔소를 습격하고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1907년 4월에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이에 합세하여 유격장 겸 도총장(都總將)으로 임명되어 청송(靑松), 영천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을 격살하였다. 또한 1907년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흥해(興海)지방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7년 12월에 정용기 의병대장이 전사한 후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총장(總將)이 되어 청송, 청하, 영덕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1910년 봄에 해산상태에 처해 있던 옛 산남의진을 다시 정비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군자금을 조달하고 무기를 획득하여 청송, 의성 등지의 일수비대를 공격하였으며, 안평(安平) 전투에서 체포되어 1910년 7월 25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전응팔의사 공훈록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이다.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측근에서 시위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책략에 의해 늑결되자, 의병운동의 재개에 대한 고종의 밀지를 받들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하향시켜 의진을 조직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영천으로 하향하여 정순기(鄭純基)·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상의하여 영천을 중심으로 각지의 의사들을 규합하여 거사계획을 확정짓게 되어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었다. 전응팔은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영천·청하·의흥(義興)·군위(郡威)·의성(義城)·청송(靑松)·영덕(盈德)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다수의 왜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7년 왜경에게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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