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1595~1649)는 조선 제16대 왕으로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추존 원종)의 맏아들로 능양군에 봉해졌으며 당시 광해군과 북인(北人) 정권의 독단적인 정치 전횡에 반발하여 서인(西人)인 김류(金瑬),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과 반정(反正)을 일으킨 뒤 이복형인 광해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어머니를 폐하고 형제들을 죽였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국난이 연이어 발생한 시기로 집권 이듬해 이괄의 난을 비롯하여 1627년에는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전쟁을 마무리하였지만, 명나라를 계속 지지하는 외교 정책으로 후금과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국을 선포하였으나 조선이 이를 인정하지 않자 1636년 또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약 47일 동안 항전하였으나 당시 식량과 물자 부족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곤룡포를 벗고 신하의 예복으로 갈아입은 뒤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고 군신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이와 같이 인조는 내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남한산성을 증축하는 등 국가 재건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쟁의 참사, 외교기조의 실패 등으로 훗날 인조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가 않다. 인조 13년(1635) 왕비인 인열왕후가 세상을 뜨자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에다 능을 조성하였고,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자리도 미리 만들어 놓았으며, 1649년 인조가 55세로 승하하자 이곳에 좌우 쌍분으로 모셨다. 그러나 이곳에는 풍수상의 결점과 더불어 화재가 자주 발생하고 석물 틈에 뱀과 전갈이 서식하는 등 불길한 징조가 보여 영조 7년(1731)에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천장(遷葬) 해와 합장릉으로 바꾸었다. 당시 영조는 10세 아들 효장세자가 죽고 대를 이을 후손을 얻지 못해 걱정이었으나 천장 4년 후 영조가 사도세자를 낳자 모두가 이 묘소의 음덕이라 생각했다.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인 양주시 어둔동 호명산(425m)과 백석읍의 챌봉(521m) 사이에서 서쪽으로 뻗은 지맥이 백석읍의 꾀꼬리봉(387.5m)을 지나 파주시 광탄면 계명산(559.9m)과 만장산(161.4m)을 거쳐 월롱면의 월롱산(229m)을 일으킨다. 장릉은 여기서 남서방으로 뻗어 내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사신사는 높이나 거리면에서 완전하지는 못하나 능역 뒤편의 곡장과 이름드리 소나무 군락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장풍(藏風)에는 큰 문제가 없다. 혈장 뒤편에는 입수가 분명하여 지기가 왕성한 곳에 자리 잡았으며 수세는 파주시청 쪽에서 흘러나오는 공릉천이 묘소 앞을 감싸며 흘러 한강에 합류한다. 이 물은 묘소 우측으로 천천히 올라가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임진강과 만나 서해바다로 흘러나가니 안쪽의 생기를 잘 갈무리해준다.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6-10-18 07:01:25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초대석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