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구리(37)국모의 간택을 받은 혜윰은 독특하게 기거하고 있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내행랑이나 중문간채 등에 의해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내행랑은 한옥에서 안채를 감싸는 안쪽 행랑채로,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구분하고 중문이나 창고로 쓰인 역할을 했기에 뿌리 깊은 양반의 근거가 되는 혈통들은 쉽사리 접근하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중문간채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놓여 바깥마당과 안마당의 경계가 되고, 안채의 사적 공간을 보호하는 문간채였다. 중문과 방과 창고를 갖추며 집의 안팎을 구분하는 결정적 말뚝이 된 셈이었다. 조금 더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머슴이 기거하던 공간은 주로 행랑채나 문간채였으며 대문과 연결되어 외부인 출입을 살피고 외양간과 창고와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정주간은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이 없어 부뚜막과 방바닥이 큰 방으로 한쪽에 작은 방을 붙이거나 토방을 임시 거처로 쓰기도 했다. 혜윰은 내행랑에 방 한 칸을 지어 기거했다. 서슬 퍼런 친모가 살아있을 때는 마음을 졸이다가 세상을 떠난 지 보름 만에 득달같이 거처를 옮겼다. 촌장 벽서도 어미를 잃은 혜윰의 뜻에 따랐지만 서예와 수묵화의 뛰어난 예술의 재주를 인정했기에 승낙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안에 내막은 이러했다. 태어날 때부터 문간채 머슴 만태의 아들인 만돌은, 혜윰과 같은 또래는 분명했다. 같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한 세월을 공유했지만 몇 마디도 말을 건넬 수 없는 신분의 차이는 엄격하면서도 지엄한 격차에 뒷걸음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머슴의 아들인 만돌은 자라면서 신분에 맞지 않는 외모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머슴이었지만 함부로 하기는 기골과 허우대가 크고 튼튼할 뿐 아니라 인물까지 출중했다. 거기다가 칼과 활이 뛰어나서 촌장 벽서의 출타에도 항시 동행하였다. 자연히 보명과 탄순과 혜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었다. 보명과 탄순은 신분이 주는 온기를 쉽게 내어주어 앞날을 그르치는 잘못된 선택을, 마음속 규율로 버텨가며 만돌을 머슴으로 받아들였다. 좀 더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혜윰은 어릴 때 몰랐던 만돌의 매력에 흠뻑 빠져, 그의 품속까지 연결시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꾀를 내었다. 수묵화에서 굵고 진한 먹물에 내닫는 붓질과 옅고 설익은 붓질은 서로를 필요로 하여 어차피 종이에서 귀결되었다. 붓에 힘을 가해 빠르게 전진하고, 한번쯤 힘을 빼고, 다시 치닫는 공간 안에서 모두 한편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구상과 노력과 작품은 하나의 명분을 더 필요로 했다. 그것이 만돌이었다. 내행랑에 지어진 자신만의 방 한 칸이기도 했다. 축시(丑時)에 만돌을 불렀다. 아랫것을 불러 하대한다는 심정은 이미 뛰어넘어 있었다. 만돌도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는 두려움도 솔직히 싹 터고 있었다. 주인집 딸과 머슴의 신분이기 전에 남정네와 여정네의 심정으로 목이 말라 몇 번이고 자리끼를 마셨고 가슴이 떨려왔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아득하게 몸이 떨려오는 놀라운 외침이고 아우성이었다. 어둠의 뒤틀기로 봐선 축시쯤인 것 같았다. “아씨, 저 만돌입니다. 축시에 부름을 받고 아씨 방 앞에 당도해 있습니다.”방안에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기척을 내고 싶어도 마른 침만 넘어가고 있었다. 혜윰은 얼마 남지 않은 자리끼를 꿀꺽꿀꺽 마셨다.“혜윰아씨, 만돌입니다.”“들어오너라. 등잔불이 없다고 망설이지 말고 사내답게 들어와라. 너도 이 시간에 불려왔다면 짐작은 했을 거야.”만돌은 방문 손잡이를 쥐고 천천히 문을 당겼다. 저 달빛이 그렇게 잔잔한지, 잔잔해서 방안으로 밀려들어온 달빛이 더욱 밝은지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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