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전투는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전하는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이다. 영천전투는 북한의 제15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군이 총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의미 있는 전투였다.1950년 6월 25일 새벽. 모두가 잠든 어둠속으로 커다란 총소리가 울리고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가슴 아픈 역사 6.25 전쟁이 시작된다.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 영천시 일대에서 벌어진 영천지구 전투, 영천대첩이다.본보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 최대격전지로 대한민국의 명운을 살린 영천전투를 기리는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를 돌아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는 영천시 마현산 일원의 체험권은 이미 3월에 개장했으며 고경면 청정리 국립영천호국원 인근 추모권 역시 올해안으로 조성사업이 마무리된다.
영천전투 전망타워와 서바이벌체험
6·25전쟁 당시 역전의 신호탄이 된 영천전투를 기념하고 후대에 나라사랑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조성돼 지난 3월 개장한 영천시 마현산 일원의 체험권은 영천전투전망타워에서의 실내 전쟁체험과 1950년 영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가전·고지전·국군훈련장 서바이벌 체험이 실시돼 전국의 호국안보체험명소로 떠오르고 있다.시내지역에 위치한 체험권은 영천전투전망타워 내 전쟁체험, 야외 전투체험(서바이벌 체험)을 통해 재미있는 안보교육, Edutainment를 추구하고 있으며, 영천의 시조이자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날개를 모티브로 새로이 건립된 충혼탑 일원 정비사업도 마쳤다. 무엇보다 마현산 일원의 충혼탑, 영천지구전적비, 영천지구전승비,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체험권 등 호국관련 시설을 클러스터화하여 시설간 연계를 통한 시너지 창출이 기대되고 있다.국립영천호국원 인근 추모권은 6·25전쟁과 영천전투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 참전세대와 전후세대간 교감의 장, 추모의 공간, 호국기념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새단장을 마친 충혼탑3월 개장한 체험권은 탱크를 형상화한 영천전투전망타워 전망대가 특색있는 건축물로 마현산의 명물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전망대 내에서는 ‘1950, 영천 대혈투속으로’라는 테마로 맵핑 입체영상으로 보는 영천전투, 지프영상으로 만나는 고지전, 영천 시가지 공방전 체험 등 전시체험물을 만날수 있다. 또한 6·25전쟁 당시 영천역과 급수탑 등을 재현한 시가전체험장,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고지전체험장, 기초체력훈련이 이루어지는 국군훈련장과 첨단 지휘통제소로 이루어진 서바이벌 체험장은 체험권의 킬러 콘텐츠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영천시는 올 4월 현충시설로 지정된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체험권 운영 활성화를 위해 중학교 자유학기제 체험프로그램과 호국안보스쿨 운영한다.특히 지난 4일, 11일 2회에 걸쳐 개최된 상반기 호국안보스쿨은 참여 어린이와 학부모로부터 호국안보라는 무거운 주제를 우드군번줄 만들기 체험, 서바이벌 체험 등을 가미,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또한 어린이집·유치원 대상 야외 체험활동, 태권도 체육관 등 무예학원의 특별 체험활동 수요를 공략, 안보교육장으로서의 가치를 살리면서 유료시설인 서바이벌 체험장 운영을 통한 수익창출까지 두마리 토끼를 잡을 다양한 방안을 마련중이다.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체험권은 매주 월요일, 설·추석 당일에 휴관하며, 9시에서 18시까지 운영된다. 전망타워 전시관은 무료로 운영되며, 서바이벌 체험장의 경우 유료시설로 성인기준 1회 이용요금은 시가전체험장 15,000원, 고지전체험장20,000원이며, 어린이 이용시설인 국군훈련장의 경우 3,000원의 이용료를 적용한다. 국가유공자 등에 대한 감면규정을 두고 있으며, 영천시민에 대해 감면 혜택을 적용한다. 이용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http://memorial.yc.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국기념관(추모권)2017년 준공을 목표로 추진중인 추모권의 호국기념관은 영천전투재현관, 영천전투추모관, 그리고 두 공간을 잇는 전이공간으로 구성된다. 영천전투재현관에는 광복이후 6·25전쟁 발발시까지의 과정, 북한군의 남진,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방어선과 그와 관련된 주요 전투를 소개하여 6·25전쟁에 대한 이해를 돕고 1950년 당시의 영천 시가지를 배경으로 영천전투의 과정을 학습하며, 그 의의를 되짚어 볼 수 있다.
전쟁·인간 그리고 삶의 기록이라는 테마로 한 전이공간을 지나면 세계유일의 분단국인 우리의 현실과 한반도에 남은 전쟁의 상흔들을 통해 평화를 염원하고 호국선열의 희생을 추모하는 공간인 영천전투추모관을 만날 수 있으며, ‘평화를 염원하다’라는 주제로 전자추모록에 글을 남길 수도 있다. 이밖에 염원의 타임캡슐, 이름없는 묘원, 꺼지지 않는 호국의 불꽃 등 무명으로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야외전시물들이 조국의 소중함을 더하게 될 것이다.
6.25참전용사 정채연씨“입대당일 전사한 고향친구의 마지막 모습 잊을 수 없어”
“6·25전투중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저격 능선에서의 육박전은 잊을 수 없습니다.”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지 23일 만인 7월18일젊은 장정들의 입대권유 선무방송 차량들이 영천시내를 돌아다니는 가운데 대전·쌍계동 고향마을 친구 13명과 함께 영천역에서 입영열차에 올랐던 6.25 참전용사 정채연씨(90·서부동).그는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후퇴하면 발포한다는 아군 지휘관의 총구를 뒤로하고 시체를 방패삼아둘러메고 고지에 올라가 육박전을 벌이며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피아간 병사들의 시체가 흙속에 섞여 썩어나가는 전장터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고 회상했다.“저녁에 재편성된 1개 소대가 전투에 투입되면 이튿날 아침이면 10여명만 살아남았다”는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그는 로켓포 파편이 터져 옆구리를 다쳐 내장이 쏟아져나오는 중상을 입고 춘천야전병원을 거쳐 경기고교 운동장에서 군의관의 맨손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이 과정에서 고향 집에 전사 통지서가 통보되는 등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한둘이 아니다.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L-19 연락기들이 휴가병의 귀대를 독려하는 전단지를 살포하던 당시, 영천군청앞마당에는 입대장정들을 무등 태우며 무운장구를 비는 전송행사가 연일 베풀어졌다며 입대 당시를 회고 한다.“가장 친했던 고향친구가 1950년 7월 입대 당일 적탄을 맞고 죽어가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영천역에서 입영열차를 타고 입대한 그는 대구농고에 집결, 3시간의 제식훈련 후에 대구역으로 이동해, ‘눈 감고 쏘지말라’는 등 간단하게 M-1소총 다루는 법을 교육받고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이미 적수중에 떨어진 안동을 뒤로하고 길안천 건너편 강변에 배수진을 친 그날밤 야간전투에서 바로 옆에 있던 절친이 전사했다.“입대하면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던 그 친구의 가슴을 아무리 눌러도 콸콸 쏟아지는피는 막을 수가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했다.그는 “이날 밤 전투에서 같이 입대했던 고향 친구중 3명을 잃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3년후 고향에돌아왔을 때 그 친구의 부모들로부터 멱살을 잡히며 “왜 혼자 살아돌아왔느냐는 원망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그는 첫 전투이후 보급이 끊기고 실탄도 떨어진 상태에서 3일동안 사투를 벌였던 영천 인근 안강전투에는 결사대로 참전했다. 그는 안강전투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진 72명의 당시 결사대 참전용사중현재까지 생존한 유일한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수냉식이었던 기관총의 총열이 달아올라 총알이 바로앞에 떨어질 정도로 죽도록 싸웠던 안강전투 등 전선을 옮겨가며 주요 전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그는 또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강추위속에서 박격포탄을 하늘에 쏘아 낙하후에 생긴 구덩이에서 추위를견디며 전투를 벌였던 개마고원 전투와 수도군단 1연대 소속으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도 참여했다.전쟁이 끝났어도 병력이 없다며 전역을 시켜주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명예제대했다는 그는 전역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했다. 상이군인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기 위해 상이군경증을 반납해 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그는 자신이 입대했던 이후에도 고향친구들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평생 또래 친구없이 살아왔다.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죄책감 등 평생 전쟁 트라우마로 고생하며 평소 말이 없다는 그는 지금도 전쟁 얘기만 나오면 열변을 토한다는 것이 가족들의 전언이다. 가족들은 또 보훈기장을 훈장으로 알고 애지중지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홍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