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벽으로 갇혀진, 답답함 같았다. 아내 죽음이후 고립된 철저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연히 의욕상실에 우울증까지 음습했다고 믿었다. 그날이 그날이었다. 희미하게 낙오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악악 소리를 지르는 시늉을 했다. 정말 지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층간소음으로 소동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부산을 택했다. 먼 거리면 좋겠고, 바다가 있었으면 더더욱 좋겠다 싶었다. 사진 동호인으로 십년 전 만난, 명함을 믿고 떠난 여행에서 터널 사고를 맞닥뜨렸다. 인연은 곳곳에 매복해 있었던 모양이다. 삶과 죽음이 흥건한 사고현장에서 한 여자와 인연이 방금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배터리가 한 칸, 충전된 생기를 느꼈다. 전화 목소리에서 진정성이 배여 나왔다. 곧 캐리어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호미곶 부근에서 작은 찻집를 하고 있는 여자를 찾아,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시켰다. 보고 싶은 바다는, 부산 바다이든 포항 바다이든 상관이 없었다. 단지 수평선이 아득하게 보이는 그곳에 나를 세워놓고 싶었다. 그러면 패배자의 기분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포항행 고속도로에 얹었다. 그것만으로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불쑥 찾아가서 별 환영을 받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긴 언제 오라는 약속도 없었다. 그냥 지나칠 기회에 한 번 들려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말자 서둘러 찾아온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쯤으로 여겨, 안부전화 정도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많이 오버하는 내가 우스웠지만 이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캐리어 속을 채운 이유는 분명하고 간단했다. 그기에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내가 죽기 며칠 전에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었다. 조금 차도가 있으면 어느 바다라도 데려가고 싶었다. 허지만 급격히 나빠지는 병세로 싸늘히 식어갔다. 아내 머릿속에는 바다가 여전히 있었을까. 심전도 계기판이 0에 닿을 때까지 바다 앞에 선 자신을 떠올렸을까.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못 믿을 남편을 두고 아내는 떠났다. 잘못한 것투성인데...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난 아내에게 마지막 속죄는 바다 앞에 서는 것이라 믿었다. 아내의 바다를 나는 이렇게 읽었다. 가끔 복받쳐 오르는 비명을 눌렀다가 바다 앞에서 터뜨려라. 넉넉하게 받아 주리라. 조급해진 마음도 조절해줄 것이고, 초심으로 되돌려 주기도 할 것이다. 먼 파도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희망도 얻을 것이다. 삶은 무릇 끝에 닿을 때마다 솟구치는 날갯짓으로, 제 속을 채워갈 그곳을 다녀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내게 숙제를 던져주고 갔구나. 필시 시간의 선상에서 조금씩 인연이라는 매듭이 연결되고 있었다. 깨닫기도 하고, 슬쩍 지나치기도 하는 이 묘한 기류를 저마다 장착하고 있을 것이다. 환갑이 된 이제야 아군의 몇 사람과 적군의 몇 사람을 가려내 본다. 여전히 주위에서 몇 사람의 허용범위를 인정하며 쉽게 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내 주위를 구성하고 있는 적당한 인원수라는 것에, 그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를 빠진 차는 호미곶을 향해 달렸다. 아, 바다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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