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다시 한 번 강조하면 업을 순화하기 위하여 항상 고운 말과 진실한 말을 자신의 습관으로 삼아야 하며, 늘 조용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다스려나가는 불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틈틈이 남에게 항상 베푸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선업을 쌓는 덕목이므로 선업을 통해 자신의 업을 순화하여 훗날 훌륭한 과보를 얻으실 것을 거듭 강조하는 바입니다.버림의안락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죽는 일은 개인적으로 괴로운 일이자, 주변 사랍들에게는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이 스스로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묘한 허망함 때문에 슬퍼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과 영원히 보지 못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에 슬픔을 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는 사람은 죽는 그 순간 슬픔이라는 의식에서조차 떠나고, 죽음을 지켜보며 애도한 사람도 며칠 뒤면 또다시 사는 일에 바빠 죽은 사람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그저 한순간의 슬픔에 죽는 자도, 죽음을 보는 자도 목이 쉬도록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한 것 이 모두 한순간의 물거품일 뿐인데도 말입니다.한편, 죽는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그 슬픔의 깊이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혹은 죽음을 어떻게 준비했는가에 따라 그 슬품을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죽음은 인생이 끝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마치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봄이 되려면 2월에 꽃샘추위가 있는 것처럼 죽음의 고통은 곧 새로운 생을 위한 꽃샘추위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괴릅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꽃샘추위 넘기듯 넘긴다고 생각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가 마련되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든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면 죽음이 곧 안락함이 될 것이고, 다음에 좋은 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난 설에 뇌사에 빠진 1살된 아이가 5명에게 장기를 기증한 바 있습니다.뇌사가 법적으로 인정된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이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뇌사 상태에 있는 환자를 돌보면서 고통을 받고 있던 가족들에게 숨통을 트여주는 일이기도 하면서, 자칫하면 인간의 생명을 소홀하게 생각하거나 경솔하게 판단하여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말로는 죽은 이에게 좋은 일을 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편리나 이익을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이용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뇌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치 장기기증을 위한 일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살아 있는 장기를 떼어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느냐”하면서 절대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물론 아직 사람의 몸이 차갑지도 않고, 육안으로 보았을 때 기계에 의지해 심장이 뛰고 있고, 아직 장기가 그 기능을 잃지 않은 상태인데 어떻게 생으로 떼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의 일에는 불가사의 한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혹시 기적이라도 일어나 희미하나마 의식을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뇌사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장기를 떼어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더더욱 어려운 일은 뇌사 상태에 있다는 것이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 나가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죽어있는 육신일지라도 영혼이 빠져나갈 시기를 주기위해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땅에 묻는 일은 없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