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 다섯 번째 구절.『일을 꾀하되 쉽 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 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세상에 쉬운 일이 없음은 살아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욕심 이 눈앞을 가리는 경우가 많으니 만사를 운에 맡기고 노력이 게을리 하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반드시 因果律(인과율)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혜로운이는 안다. 설령 지금 눈앞에 노력 이상의 결과가 나타났다 해도 그것은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설명하자니 三世因 果(삼세인과)라는 단어가 필요한 것이다. 다만 현재 주어진 과정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아 현재 결과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복 짓는 일에 힘쓸 일이다. 이렇게 마음 쓰다 보면 절로 행복이 찾아온다.(지난 호에 이어)불행하게도 丁未(정미) 九月(구월) 立巖戰(입암전)에서 山南義陣(산남의 진) 大將(대장) 鄭鏞基將軍(정용기장군)과 그의 部下某某將領(부하모모장령)들이 戰殉(전순)하고 大將(대장)의 父公(부공)인 東广先生(동엄선생)이 대중을 통솔하고 진세를 다시 정비하여 경상도 各(각) 州郡(주군)을 連戰連破 (연전연파)하고 큰 전과를 올리다가 淸河(청하)에서 적의 집중공격에 빠져 被執(피집)되어 永川(영천)에서 殉節(순절)하고 대중은 동엄선생의 생시유명으로서 農皐公(농고공) 崔世翰(최세한)을 後繼大將(후계대장)으로 세우고 작전계획을 유격전으로 전개하여 各部要人(각부요인)들이 지역을 분담하니 청송은 중요한 지역이 되었기로 東西兩陣(동서양진)을 배치하기로 되었다 西(서)에는 영천 신령 의흥 의성 군위 안동 각 군의 접경을 담당하게 하고 東(동)에는 영천 경주 포항 흥해 청하 영해 영덕 영양 진보 안동 각 군의 접경을 담당하기로 되었으니 公(공)은 그때에 東陣(동진)의 中軍將(중군장)이 되었다 작전상황을 말하면 수백 명의 일선장병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발에 감발을 감고 손에 총을 들고 바람에 앉아 밥을 먹고 산길에 서서 밤을 세웠으며 후방정보는 나뭇지게 나물광주리 고기장사 엿도부군 모든 행세로 되어 합심합력 되었기에 청송땅에 들어오는 왜놈들은 살아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하였으나 엄동극한이 되는 그 절후에는 독산에 푸른 소나무도 큰 불을 받게 되었다. 각 진의 분진이 모두 전멸되고 청송 동진도 高臥室(고와실) 접전에서 대패를 당하고 종말되었다 公(공)은 말내에 被執(피집)되어 적들이 권유하는 歸化(귀화)를 거절하고 무한히 고초를 당코 十年刑(십년형)인 언도를 받고 大丘獄(대구옥)에 복역하다가 七年(칠년) 옥고를 겪고 석방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형제 처자를 하직하고 강원도 오대산 지역에 잠적하여 十年(십년)세월을 보내면서 재거운동을 공작하다가 그의 家人(가인)들의 애걸에 할 수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아들 善慶(선경)이 관망을 준비하여 올리고 인근마을에 出入하시기를 권하니 답왈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되어 쓸 필요도 없으며 놀러갈 곳이 어찌 있느냐 하고 다시 주왕산에 은신하여 동지들을 연락하다가 八一五(팔일오) 해방을 맞이하여 집에 돌아와서 독립의 서광을 기뻐하더니 뜻밖에 三八(삼팔)선 그 文字(문자)가 公(공)의 가슴에 또 병이 되어 항상 슬퍼하다가 六二五(육이오) 동란을 당하여 그에 관계된 심화가 더욱 발작되어서 별세하다.<山南義陣遺史376~378p>우영조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6년 5월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형성되자 진보(眞寶)지방의 소모책임을 맡았다. 그 후 정용기의 체포 및 의진 해산 등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용기가 부친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07년 8월 의진을 재구성하자 다시 입대하여 신성(薪城)·청송(靑松)·자양(紫 陽)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1907년 10월 입암(立岩) 전투에서 정용기가 순국하자 그의 부친 동엄 정환직(東广 鄭煥直)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신녕(薪寧)·의흥(義興)·안동(安東)· 청송·청하(淸河) 등지에서의 대소전투에 참가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2월 11일 정환직이 또 체포되어 순국하자 최세한(崔世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동부의진의 서종락(徐鍾洛) 의병장과 함께 활약하였다. 1908년 2월 의병장 서주일(徐周一)의 휘하에서 총기를 휴대하고, 이재원(李在元)으로부터 소 1필을, 박태래(朴泰來)로부터 70여 명의 급식을 제공받는 등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910년 2월에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