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孝子)이감(李敢) 호는 문한당(文閒堂)이다. 조선의 벼슬은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초상에 모두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선덕(宣德)1210)1426년부터 1435년까지 사용된 중국의 연호이다. 명나라 선종(宣宗, 재위 1425∼1435)의 재위 기간에 사용되었으며, 명나라는 치세에 하나의 연호만 사용하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용했으므로 선종을 선덕제(宣德帝)라고 부르는 이유가 되었다.병오년 정려(旌閭)1211)정려(旌閭)는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부산 지역 출신의 효자(孝子) 충신(忠臣) 열녀(烈女)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했던 일이다. 이를 정표(旌表), 정문 등이라고도 한다. 처음 정려를 세운 것은 신라 때였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많이 세워졌다. 조선 왕조는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하여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게 신분의 높고 낮음, 귀천(貴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정표하였다.조선 왕조의 정려 정책은 1392년(태조 1) 7월에 방침을 밝힌 이래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 효자, 의부(義婦), 절부(節婦)에 대해 지방에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고,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였으며, 또 일부에게는 행적에 따라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었다.따라서 사족(士族)의 경우에는 가문의 명예였으며, 노비의 경우에는 면천(免賤)하여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실제 생활에 이익을 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했다. 정표자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 중에는 효자·충신·열녀 등의 수가 평시보다 아주 많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수상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어 정표자의 진위(眞僞)가 자주 논의되었다. 정려와 정문의 유적은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 많다. 부산 지역에서는 조선 시대에 건립된 정려가 동래현(東萊縣)과 기장현의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정려가 다수 건립되었다.개항 이후 최근 서구화로 유교 문화와 가치관이 소멸되어 가고 있지만, 전통을 중시하며 옛 것을 이어 가는 모습도 존재한다. 부산 지역에서 정려가 보존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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