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47)수피아가 왔다. 장마철을 넘긴 그날,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밖을 내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 낑낑 거렸다. 그래야만 세상을 향한 반항이었고 저항이라 생각되어졌다. 이 덩그런 집안에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한 불안과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세월에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소파에 어깨를 한껏 파묻고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무료함에 허덕이던 내 달팽이관을 문소리가 먼저 건드렸다. 이석증에 의한 어지럼증이라고 치부하기엔 강렬했고 북적거렸다. 한 톨의 힘까지 모아 돌아보았을 때 거짓말처럼 집주인이 성큼 들어섰다. 감격스럽게 반가웠지만, 손을 뻗어 탁자에 있는 해골을 집어 수피아에게 던졌다. 열어놓은 현관문 사이로 빗줄기는 쌓여들고, 순간적이었지만 들고 있는 우산으로 해골을 내동댕이친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울 아찌, 많이 삐치신가 보네. 기겁을 하던 사람 머리뼈를 쥐고 던질 정도면.”“넌 한번이라도 내 생각을 하긴 한 거야? 어떻게 사라질 생각을 했어. 체중이 오 킬로 빠진 내 꼴을 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얼마나 별생각으로 불안했는지.”“내 한 몸 지켜내지 못할까봐, 걱정 붙들어 매세요. 아찌의 똑순이잖아.”“그건 그렇고 휴대폰은 왜 안 들고 갔어? 그리고 어디 간다면 어디 간다고 말은 해야 되잖아.”“이렇게 무사히 왔으면 됐잖아요. 앞으로는 꼭 보고 하겠슴돠.”힐끗, 현관문 앞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해골을 보며 수피아는 눈꼬리가 축 쳐졌다. 빗자루를 들고 와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저토록 맹렬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단박에 내 시야로 들어왔다. 정물처럼 붙박혀 지낸 며칠을 잠재울 도전적인 기세였다. “누군지 모를 일인(日人)으로 낯선 땅에서 죽음도 억울하지만, 수백 년을 더 버틸 수 있는 머리뼈마저 박살이 났군요. 아찌의 잘못도 커지만 내가 죽일 년이네.”빗질은 현관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한이 서린 머리뼈 가루도 납작 엎드린 채 빗질을 따라 문밖으로 흩어졌다. 파편 조각들도 사정없이 밖으로 내몰던 수피아가 고개를 들어 주방 쪽으로 시선을 고정해둔 채 내게 말했다. “집 떠나면 개고생, 아찌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어요. 라면 끓여주세요. 아찌표 라면이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숨 넘어 갈 뻔 했어요.”“뭘 예쁘다고 라면을 끓여줄까. 볼기짝을 쳐도 풀릴 턱이 없지.”양은 냄비에 물을 맞추어 올렸고, 가스 불을 켰고, 조금 전까지 낑낑 거렸던 몸을 손뼉으로 자극했고, 무사히 돌아온 수피아를 보며 눈물이 맺혔고, 그리고 손을 씻었다. 불빛을 밝힌 밤 열차는 어디로 가는지 빗줄기를 타고 멀어지는 풍경이, 열어놓은 현관문 사이로 비춰졌다. 수피아는 조금 전 내 모습처럼 소파에 몸을 꾸깃꾸깃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내 모습이 아니라 그녀의 습관에 내가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 좀 닫아줄래요. 추위를 느끼는 구월이네.”문을 닫으면서, 문틈 사이에 버티고 있는 해골 찌꺼기를 손으로 쓸거나 입으로 불거나 해서 어떻게든 무심히 스친 인연으로 매듭처리 하고 싶었다. 백년도 더 된 목조건물을 위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수피아가 왔다는 데서 새로 시작하는 것은 분명했다. 반숙된 계란을 라면 위에 올리고 반쯤 기울이진 수피아를 깨웠다. “울애기, 이제야 돌아왔구나. 고마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