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에서도 조선시대 의승군(義僧軍) 즉 ‘전쟁에 승려들의 참여하는 유사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특수한 사건이자 현상이다.‘호국불교’라는 개념은 국가와 불교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표현과 함께 의승군(義僧軍)의 활동이 불교와 국가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국가권력에 불교가 종속되며 왕법 수호를 위해 불교계가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용어이기도 하다.그래서 스님들의 전쟁 참여 등의 문제는 역사와 시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제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파악하고 접근이 필요하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속에서 산중 승려가 전쟁에 참여하여 일반 유생들도 세우지 못한 충의의 공적을 세운 것은 성리학적 국가와 사회 통제 구조속에서 불교 존립의 중요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활동 양상을 간략히 살펴 임진 7월에 선조는 묘향산에 있던 청허 유정(淸虛 休靜)을 불러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데 앞장서 줄 것을 부탁하였다. 선조에 의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제수된 청허 휴정은 평안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전국 사찰에 격문을 띄워 각지에서 5천 명의 의승군이 궐기하였다.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의엄(義嚴), 강원도 관동지방에서는 사명당 유정(四溟 惟政), 호남의 뇌묵 처영(雷默 處英)을 비롯해 각지의 승장들이 의승군을 모아 일어났다. 또한 충청도에서는 기허 영규(騎虛 靈奎)가 8백여 의승군을 불러 모았다.그런데 대규모 의병군의 첫 승리는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경북 영천에서 일어났다. 아직 어떤 논문이나 전쟁사를 이야기하는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사건이 영천성수복전투 속에서 찾아 낸 것이다.그동안은 1592년 음력 8월 1일 청주성문에 도착한 의승병장 기허 영규(騎虛 靈奎)의 의승군은 음력 8월 1일 이후 의병장 趙憲을 따르는 7백 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함락시킨 것이 가장 앞선 기록으로 조명하고 역사의 기록에 남겨 왔다.그러나 청주성수복보다 10여일 앞서 음력 7월 23일에 영천성 앞 완산뜰(추평)에 진을 친 영천의병부대 창의정용군 속에는 서반상인(西班常人) 200여명이 참여하여 “이순신의 명량과 같은 전투를 이끌어 낸 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영천성수복전투의 승리로 인해 요동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의 참전을 유도해 냄으로써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결과적인 승리로 이끈 명군의 참전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이 기록은 영천역사박물관(관장 천진기)에 소장된 최응사(崔應泗,1520∼1612년) 『유정일집』, 호수 정세아 『호수실기』, 『영양복성사실기』 와 함께 2점의 필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와 관련된 전시회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에서 제 1261년 개산대재 기간인 9월 27일부터 ~ 28일까지 전시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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