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말씀은 지극히 당연하여 이해하기 쉬우나 행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그만큼 우리의 업장(業障)이 두텁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왕삼매론 열 번째 구절도 그렇다.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오두환종사관(從事官)의 책임으로 1906년 병오에 영해진과 연결되어 영해진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전말(顚末)은 모른다. 〈원문〉吳斗煥은 以從事之責으로 丙午에 通寧海陣而歸之하고 顚末不詳이라  <山南倡義誌 卷下61p>吳斗煥 義士 略歷(오두환 의사 약력)吳斗煥(오두환)은 丙午(병오) 丁未(정미) 양년에 寧海(영해) 申泰浩(신태호) 의진과 서로 呼應(호응)할 때 연락하는 종사로 내왕하였고 그 후 전말은 不詳(불상)이라 <山南義陣遺史477p>오두환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일제가 1907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면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전개되었다. 오두환은 경상북도 영덕군 외남면(外南面) 쟁암동(爭岩洞)에 거주했다. 1908년 음력 11월경 정환직(鄭煥直)의 부하였던 신석존(申石存) 외 십수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서 영덕군·청하군(淸河郡)을 중심으로 군자금·군수품을 모집하였다. 1909년 음력 1월 9일에서 10일에는 김성일(金聖一) 등 6명과 함께 영덕군 회동(晦洞)에 사는 이연호(李連浩)에게서 군자금·군수품을 모집하였다. 음력 2월 8일 밤 오두환은 수 명의 의병과 함께 같은 군 서면(西面) 산하동(山下洞)에 사는 윤기만(尹基萬) 집에 들어가 군자금·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9년 4월 20일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상인(强盜傷人)·방화죄’로 교형(絞刑)을 받았다. 5월 29일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도 상고가 기각되어 교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남석광자는 이백이고 본관은 영양이다. 경재 천주의 후예이다. 남석우, 남석인 등 여러 일족들이 죽은 뒤로부터 절치부심하고 죽을힘을 다해 산남의진을 따랐지만 산남의진이 패하자 다시 청송진으로 돌아가 서종락을 따라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다가 고와실의 패전 이후 몸을 숨겼다.〈원문〉南錫光은 字而伯이요 英陽人이라 敬齋天柱之后라 自錫佑錫仁諸宗之死後로 切齒腐心하고 死力從山南이런니 至大陣에 復歸靑松하야 從徐鍾洛而盡心死力이라가 有高臥室敗而隱身하다  <山南倡義誌 卷下61p>南錫光 義士 略歷(남석광 의사 약력)南錫光(남석광)은 貫鄕(관향)은 坡平(파평)이오 靑松(청송) 出身(출신)이라 本陣(본진)에 從事(종사)로 활약하다가 후에 靑松東部陣(청송동부진)에 召募將(소모장)으로 활약하였고 후에 은신하다<山南義陣遺史475p>남석광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1881년 2월 22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거성리(巨城里)에서 아버지 남경하(南敬夏)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자는 이박(而珀)이다. 1906년 3월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산남 의병부대는 을사늑약 이후 동엄(東嚴)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은 그의 아들 단오(丹吾) 정용기(鄭鏞基)가 향리 영천(永川)에서 주변 각 군의 의병을 규합하여 창의(倡義)한 의병부대이다. 청송 지역에서 영양 남씨 일족인 남석우(南錫佑)·남석인(南錫仁)·남석하(南錫夏)·남석구(南錫球)·남석술(南錫述)·남석우(南錫祐) 등 17명 중 한 명으로 산남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5월 21일 신돌석 의병부대가 영해(寧海)에서 관군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하던 정용기가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간계에 속아 붙잡히자 청송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8월 정용기가 재기하여 의병부대를 재편성할 때 다시 참여하여 영천·청송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9월 20일 청송 안덕(安德)의 신성전투(新城戰鬪), 10월 1일 영천 자양전투(紫陽戰鬪), 10월 2일 영천 검단전투(檢丹戰鬪)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0월 7일(음) 9. 2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이한구(李漢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한 뒤, 아버지 정환직의 휘하에서 입암(立巖)·동대산(東臺山)·화장(花壯)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 해 12월 영덕전투(盈德戰鬪) 이후 대장 정환직이 청하면(淸河面) 각전(角田)에서 붙잡혀 사망하자 1908년 2월 최세윤(崔世允)이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산남 의병부대는 소부대를 단위로 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청송 지역은 주왕산(周王山)을 중심으로 청송읍(靑松邑)과 부동면(府東面), 그리고 부남면(府南面) 일원의 청송 동부 지역은 서종락부대(徐鍾洛部隊) 부대, 철령(鐵嶺) 일대의 청송 서부 지역은 남석구부대(南錫球部隊) 부대가 활동하였다. 이때 1908년 2월 편성된 서종락 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서종락 부대는 대장 서종락을 중심으로 중군 우영조(禹永祚), 소모장 윤용식(尹龍植), 군문집사 조경옥(趙景玉), 참모장 심일지(沈日之), 도총 오상영(吳相泳), 도포장 심지국(沈智國) 등으로 편성되었다. 1908년 10월 이후 서종락·김사곡(金舍谷)·윤상촌(尹裳村) 등 핵심적인 인물들이 붙잡히거나 귀순함으로써 청송 지역 의병부대는 점차 해체되어 갔다. 1910년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에서 패한 뒤, 각처를 전전하며 은신생활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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