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48)자호천을 기점으로 세월이 넘쳐났고, 모난 돌멩이가 자리 잡는가 하면 곧 몽돌로 바닥이 채워져, 쪼개고 다듬어며 성질을 죽이기까지, 한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 흔적들이 짜치면서 따글따글 거렸다. 숱한 민물고기들이 다녀갔고, 숱한 들과 산을 누빈 짐승들이 다녀갔고, 숱한 나그네가 목을 축이며 다녀갔다. 홍수로 범람하던 그때가 자호천의 전성기일까. 가뭄으로 맥이 끊겨 바닥이 드러난 그때가 자호천의 쇠퇴기일까. 처음부터 전성기도 쇠퇴기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생명을 다한 나뭇잎이 살점처럼 떠다니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을 필히 풀어놓아 띄워주었다.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 숲이 시작되었고 하루에도 몇 번 햇살 봉우리들이 넘쳐났다. 밤이 되면 지문을 새긴 달빛의 목멘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오오 인생이여. 그 발걸음을 내려놓고 싶다면 지금 자호천이면 타당하다. 아득하고 뜨거운 건 둘째치더라도 모두에게 충족될 수 없지만 무뎌지지 않는 까치발이 요긴할지 모른다. 나는 창문을 열어두고 자호천의 풍경 속에 젖었다. 라면 국물까지 말끔하게 비운 수피아도 내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비는 그칠 것을 전제로 빗방울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아찌, 집이 흔들려요.”최근 들어 그런 생각이 부쩍 들었다. 수피아가 며칠 집을 비웠을 때 금방이라도 풀썩 주저앉을 것 같은 집안에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수피아를 두고 이집을 떠난다는 것은 생채기에 딱지를 포기하는 꼴이라 여겼다. 상처가 아물면서 자연스럽게 보호막이 형성되는 과정을 건너뛰면, 자연치유가 불가능해지기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목조건물은 백년을 훌쩍 집어삼킨 낡음으로 급발진의 증세까지 엿보였다. 어느 때는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제자리에서 뒤뚱뒤뚱 중심을 잡는 안간힘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전문 집수리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수명을 다한 이런 집의 수리는 아예 통째로 새로 짓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국유지라면서? 헌집을 허물고 새집을 올릴 수 있을까. 허가도 나지 않겠지만 얼마 있다가 하천부지 사업에 묶여 비워줄지도 모르는 위험을 항상 떠안고 살게 될 거야.” “전 이 위태로움이 참 좋아요, 어차피 불가능한 집수리에 신경을 써느니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 집의 수명과 함께 제 최후도 함께 하고 싶어요.”“복에 겨운 소리! 꽃다운 나이에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이집도 잘 모르지만 기둥 몇 개 더 박고 급한 것부터 수리하면 몇 십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사계절 내내 이만한 풍경을 질리지 않고 감상할 수 있는 집이 흔한 줄 알아.”“차라리 그 돈 있으면 돛단배 하나 사서 나루터에 묶어 두세요.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는 날, 비릿한 물 향기 따라 푸른 생애일 때 정말 마감하고 싶어요.”“늙은이 앞에서 까분다.”“삼십대도 사십대도 오십대도 원치 않아요. 수피아의 생애엔 이십대밖에 없어요.”화제를 돌리기 위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라면 먹은 빈 그릇은 각자 설거지통에! 그 정도는 도와줘야 집안 꼴이 그나마 버틸 수가 있는 거야.”수피아가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마루바닥이 덩달아 삐꺽 거렸다. 정말 맑은 날에 시내로 나가서 집수리 업자를 물색해봐야 한다고 다짐했다. 혹시 고집을 피우며 버틸지 모를 수피아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불쑥 착수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며 설거지를 했다. 어디에 다녀 온지 알 수 없지만, 집 주인으로 복귀해줘서 구멍 난 가슴 한쪽이 메꾸어진 것 같았다. 푸르르 웃음이 새여 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