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잡을 수 없는 날씨 탓에 농작물도 사람도 힘든 요즈음이다. 사람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윤회 속에 존재하고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며 현상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법칙 속에 있다.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다. 그 어떤 것이나 현상도 이 법칙에서 벗어나 존재하지 못한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 백년 안팎의 삶이 모두인 사람이 천년, 만년, 광년(光年)을 경험할 수 없음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한다. 참 어리석다. 날씨의 변화에조차 속수무책이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존재인 것을! 裵淵楫 義士 略歷(배연집 의사 약력)②그렇게 하였으나 끝내 큰 운수가 한정이 있으니 할 수 없는 때가 되었다 각지의 의병진이 모두 서리맞은 가을 잎사귀처럼 차례로 떨어지고 청송동부진도 高臥室(고와실) 패전에서 일이 끝났다 이날에 公(공)은 적에게 쫓기어 인근마을 김씨댁 내실에 들어갔다 그댁 부인은 公(공)을 벽장 안에 숨겨두고 이불보로써 벽을 가리고 앞뒷문을 모두 열어두고 기대하였다 조금 되어 왜병이 따라와서 묻는다 그 부인은 뒷문으로 뒷산을 가리키니 왜병은 산을 찾아가더라 날이 저물어 그 부인은 옷 한 벌을 준비하고 명태밥국을 준비하고 술을 준비하여서 권하기를 대장부 일이 급하고 형세가 궁하면 불가불 그 몸을 조심할 것이니 생각할 바인저 公(공)은 답왈 누님이어 누님이어 오늘 날 은혜는 三生(삼생)에 맹서할 것이라 하고 드디어 출발하면서 주인의 세덕을 물어보니 주인의 성씨는 경주 金(김)씨요 그 부인의 성씨는 풍산 柳(류)씨라고 하더라 이 뒤로부터는 단체행동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밀림지대로 다니면서 손에 천보대 한 자루는 가지고 있었다 재말리에서 내려다보니 평지에 적병이 이르는지라 잠복하여 있다가 적병이 산밑에 오는 것을 보고 발포하여 적병 三四(삼사) 명을 죽였다 적병들은 산을 향하여 여러 번 쏘는 바람에 公(공)은 왼쪽 엉덩이에 관통상을 입었다 감발을 풀어서 상처를 동여매고 관동지방에 들어가 은적하여서 수십년 광음을 흘려보내고 적의 수사망이 풀린 뒤에 돌아와서 가족을 돌보고 광복운동에 이바지하다가 八一五(팔일오) 해방을 맞이하고 六二五(육이오) 동란을 슬퍼하다가 辛卯(신묘) 正月(정월) 十三日(십삼일)에 향년 七十四(칠십사)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자손록은 이 다음에 가장과 비문이 있기로 생략한다 <山南義陣遺史416~419p>배연집의사 공훈록배연집(裵淵集)[1878~1953]은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장영수위(將營守衛)를 역임하였으며, 1908년 2월부터 서종락(徐鍾洛)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원서(元序), 이명은 배연집(裵淵楫) 혹은 배상언(裵尙彦). 1878년 5월 5일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하속리 925번지에서 아버지 배선화(裵善華)와 어머니 남원양씨(南原梁氏)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죽당(柏竹堂) 배상지(裵尙志)의 18세손으로 안동에서 세거하다가 청송으로 입향한 배유(裵惟)의 후예이다. 일명 배 포수로 불리던 역사(力士)였다. 관직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고 산남의진을 결성하자, 배연집은 의성(義城)의 박태종(朴泰宗)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6년 4월 대장 정용기가 신광면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간계에 속아 체포된 뒤 귀향하였다. 1907년 음력 4월 정용기가 재기하자 다시 참가하였다. 1907년 10월 2일 배연집은 정용기가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비안(比安)·의성 일대에서 의병을 소모(召募)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배연집은 비안과 의성 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소모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7일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이한구(李韓久),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圭燮) 등 지휘부가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하는 참극을 맞이하였다. 1907년 10월 7일 대장에 추대된 정환직이 산남의진의 진영을 재편성할 때, 청송 지역에서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던 이세기(李世基)는 중군장(中軍將), 임용상(林龍相)은 좌포장(左砲將), 김진영(金震榮)은 군문집사(軍門執事), 홍구섭(洪龜燮)은 진군지휘(進軍指揮)에 임명되었고, 배연집은 김성극(金聖極)과 함께 장영수위(將營守衛)에 임명되었다. 1907년 12월 11일 대장 정환직이 청하군 죽장면 고천(高川)의 각전(角田)에서 생포되어 총살·순국한 뒤 청송으로 귀향하였다. 1908년 2월 5일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으로 취임한 최세윤(崔世允)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持久戰)을 계획하여 24개 지역 79명으로 구성된 지역 활동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이때 청송 동부진은 서종락이 지휘하며 주왕산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청송 서부진은 남석구(南錫球)가 지휘하며 철령(鐵嶺)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배연집은 서종락 부대에 참여하여 청송읍과 부동면[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배상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0년 배연집은 청송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종락과 함께 경주·영천·의흥·청송을 관할하는 일본군 수비대 합동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高臥室)로 들어갔다. 대장 서종락을 비롯한 청송 동부진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의병들은 고와실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吉安川) 백석탄(白石灘)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분대인 청송진은 해산하였다. 배연집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고와실 마을로 잠입하여 김씨가(金氏家)의 풍산유씨(豐山柳氏) 부인이 목화를 잣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고, 풍산유씨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1953년 9월 1일 사망하였다.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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