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9월9일, 중구일을 맞아 이석 장군 묘소를 찾았다. 보현자연수련원 조정숙 원장님이 원을 세워 차(茶) 올리는 날이다. 올해는 건강상 이유를 들어 벌초를 않아서 긴가민가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나였다. 풀은 우거지고 비가 잦은 탓에 봉분도 흘러내렸다. 새로 세운 ‘산남의진 중군장 이석장군 묘소 가는 길’ 표지판을 보고 혹시나 누가 다녀갔다면 어쩔까 하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강이라도 벌초를 했지만 다시 올라와 정비하리라 하고는 또 시간이 흐른다. 비록 산남의진기념사업회 업무에서는 물러났지만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산남의진을 선양하리라는 초심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했건만, 작심삼일이다. 후손 없는 의사의 묘소를 돌보는 일도 선양활동에 있어 중요한 부분일 터. 하지만 기념사업회가 활동의 폭을 넓혀 이석장군 묘소를 돌봐주었으면 하는 기대는 실없는 바람에 불과할 테지. 남석태자는 순보이고 본관은 영양이다. 운강공의 후손이다. 처음 화산진(華山陣)을 좇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다 산남의진의 거사(擧事)에 응하려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서종락 또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산남의진 의병들이 입을 군복을 준비하던 중에 양인이 서로 협력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본진으로 보내주고 산남의진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불행히도 영덕 전투가 패했다. 그 때문에 스스로 오래 묵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한으로 여기고, 서종락과 청송고을의 사림들 모두 함께 청송진으로 가서 의진을 다시 편성하였다. 서종락을 장수(將領)로 추대하여 각 지역을 경영하다가 고와실전투에서 참혹하게 패배한 뒤 몸을 숨겼다.〈원문〉南錫台는 字舜輔요 英陽人이요 雲崗公後라 始從華山陣하야 多方活躍이라가 應山南之擧하고 欲歸從之하야 歸鄕하니 徐鍾洛이 亦歸鄕하야 方在山南軍服準備之中이라 相互協力하야 召募而送之하고 欲赴入之際에 不幸有盈德之敗故로 自恨宿願未遂하고 與鍾洛으로 悉起本鄕之士林하야 再編而推鐘洛爲將領하고 經營各地라가 至高臥室하야 事至慘敗而隱身하다<山南倡義誌 卷下61~62p>南錫台 義士 略歷(남석태 의사 약력)南錫台(남석태)는 字(자)는 舜輔(순보)요 관향은 令孃(영양)이라 처음에 화산에서 종군하였고 그후 본군에 돌아와서 동부진을 도우다가 전말은 불상이라 <山南義陣遺史477p>남석태의사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순보(順輔), 혹은 순보(舜輔), 이명은 남태석(南台錫). 1879년 4월 4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동면(縣東面) 월매리(月梅里) 338번지에서 아버지 남영철(南永喆)과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6년 경상북도 영천 신녕(新寧)에서 창의한 화산의진(華山義陣)에 참여하였으며, 을사늑약 이후 1906년 3월 창의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였다. 청송 지역에서 영양남씨 일족인 남석우(南錫佑), 남석인(南錫仁), 남석하(南錫夏), 남석구(南錫球), 남석술(南錫述), 남석광(南錫光) 등 17명 중의 한 사람으로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소모(召募)의 임무를 맡아 의병 28명을 모집하고 총기를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06년 5월 21일 신돌석(申乭石)의진(義陣)이 영해(寧海)에서 관군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하던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신광면(神光面) 우각리(牛角里)에서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참령 신석호의 간계에 속아 체포된 뒤 청송(靑松)으로 귀향하였다. 1907년 8월 정용기가 재기하여 의병진을 재편성할 때 다시 참여하여 영천·청송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9월 20일 청송 안덕(安德)의 신성전투(新城戰鬪)와 10월 1일 영천 자양전투(紫陽戰鬪), 그리고 10월 2일 영천 검단전투(檢丹戰鬪)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9월 1일 임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정환직의 휘하에서 입암(立巖), 동대산(東臺山), 화장(花壯)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7년 12월 영덕전투(盈德戰鬪) 이후 대장 정환직이 청하면(淸河面) 각전(角田)에서 체포되어 순국한 뒤 귀향하였다. 1908년 2월 최세윤(崔世允)이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산남의진은 소부대를 단위로 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청송 지역은 주왕산을 중심으로 청송읍(靑松邑)과 부동면(府東面)[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府南面) 일원의 청송 동부 지역은 서종락부대(徐鍾洛部隊), 철령(鐵嶺) 일대의 청송 서부 지역은 남석구부대(南錫球部隊)가 활동하였다. 1908년 2월경 편성된 서종락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10월 이후 서종락, 김사곡(金舍谷), 윤상촌(尹裳村) 등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체포되거나 귀순한 뒤 청송 지역의 의병 부대는 점차 해체되어 갔다. 1910년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에서 패한 뒤, 이름을 바꾸고 은신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61년 4월 12일 사망하였다.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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