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 사찰의 대부분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 장풍국(藏風局)인데 비해 신륵사는 강가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사신사가 낮은 와형의 혈장에 입지하고 있다. 이 절은 여주 시민들의 수해 방지를 위한 비보(裨補) 사찰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강가에 위치하여 수해 발생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수해 취약 지점에 사찰을 건립한 것은 구조물에 의해 지반의 침식방지 효과가 있고 사찰에 기거하는 승려들로 하여금 수해 발생 시 쉽게 노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고려시대의 고승 나옹선사가 입적하여 부도탑에 사리를 모신 곳으로도 유명하고, 조선조 세종대왕의 무덤을 영릉으로 이장할 때 왕실의 무덤을 지키는 원찰로 지정되어 더 유명해졌다. 그 당시에는 영릉 원찰로 삼았다고 하여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으나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토록 한 후 영릉의 원찰로서 의미가 약해지면서 다시 신륵사라 부르게 되었다. 신륵사란 이름은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는데, 인당대사(仁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절의 이름을 신륵사(神勒寺)라 했다.”고 한다. 이 절은 화려한 극락전과 고려 말 불교계의 거목이었던 지공, 나옹, 무학 세 스님의 영정을 모셔 놓은 조사당과 명부전, 대장각기비, 다층석탑과 다층전탑, 보제존자 등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다양한 유물들이 숨 쉬고 있는 고찰이다. 신륵사는 신라말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원효대사의 꿈속에 이 사찰이 세워지게 된 유래가 지금껏 전해져 내려온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었던 연못을 가리키며 이곳은 신성한 사찰이 들어설 자리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질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는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들이니 아홉 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하였고 그런 후에야 이곳에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인 태백산맥에서 강원도 오대산을 거쳐 계속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와 여주시 봉미산(鳳尾山/156m)을 일으키고 여기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 남한강을 만나면서 그 행로를 마쳤다. 그러므로 신륵사는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고찰로 오대산의 정기가 봉황의 꼬리까지 이어진 봉미산 자락에 입지하여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물길을 진압하기 위해 세워진 비보사찰(裨補寺刹)이다. 신륵사 구룡루 앞에는 수령 600여 년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나옹선사가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자라 지금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이 나무 역시 신륵사 전면의 허(虛)한 부분을 막기 위한 풍수 비보(裨補) 차원에서 심어졌으리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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