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 동안 필리핀을 다녀왔다. 남편과 나는 동갑이지만 내가 정월 생이라 먼저 칠순을 맞게 되었다. 게다가 내 생일 이틀 후는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 결혼한 지 46년 동안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언제나 추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 세 자녀들이 따뜻한 곳으로 여행을 가기를 권한 데다 관절염에도 더운 곳이 좋다기에 칠순 기념으로 필리핀을 택했다. 필리핀의 세부는 우리 부부가 15년 전 처음 골프를 접한 곳이다. 남편이 국제기구의 필리핀 대표로 주재할 때 만난 후배가 세부에 있는 일본인 소유 골프장을 인수해서 분양할 때, 우리가 회원권을 첫 번째로 사 주면서 자연스레 골프에 입문했던 것이다.세부 막탄 공항에 내려서 마중 나온 직원을 만나고 세 시간 버스길을 달려 골프장 리조트에 도착했다. 헤아려보니 지난번 방문 때부터 거의 5년이 흘러가서 모든 게 낯설 줄 알았는데 한국인 직원뿐 아니라 필리핀인 캐디나 직원까지 낯익은 얼굴이 그대로 있어 도리어 내가 놀랐다. 모두들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이 세부 인터내셔널 골프 리조트는 세부 공항에서 좀 떨어져 있는 것이 흠이지만 바로 바다에 면해 있어 언제든지 해수욕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골프장은 한국의 골프장처럼 고급스럽다거나 엄격하지 않다. 한국에서 골프를 칠 경우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캐디의 지시(?)대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 세부에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출발해 개인 캐디의 시중(?)을 받으면서, 잘 못 치면 몇 번 정도 또 쳐 가며 실력을 연마할 수 있다.마침 세부의 한국인 회사에 주재하고 있는 젊은 지인 부부가 초등생 두 자녀를 데리고 와서 같이 골프를 치게 되었다. 두 어린이의 골프 실력이 대단해 장래를 기대할 정도라, 같이 치는 내내 즐겁고 흐뭇했다.골프가 끝난 후엔 부드러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수영하며 저녁에는 전문 마사지사가 피로를 풀어주었다. 한국 골프장의 반 가격으로 골프를 치면서도 불만이 많았던 지난날 생각에 부끄러워지며 아직도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한국과 필리핀의 경제력 차이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내가 사치를 누렸던 것은 숙소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책들을 읽을 때였다. 틱 낫 한 스님의 <소음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의 침묵>이라는 책이 먼저 눈에 띄었다. 스님은 걱정과 불안을 없애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방법으로 긴 호흡을 주장하였다. 한번 길게 들이쉬면서 미소 짓고 한번 길게 내쉬면서 근심을 내려놓는 방법이다. 두 번째 책은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이다. 이 책도 내게 삶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주위에 널려 있는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였는데 최소한의 물질로 삶을 영위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건이란 일주일이면 익숙해지고 일 년 후엔 싫증이 난다’는 것이다. 인생 황혼기에 있는 지금, 주위의 구름들이 사라져야 아름다운 낙조를 보게 되듯이 미리미리 주변을 정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다이빙에 관한 잡지 <해저 여행>이었다. 필리핀의 아름다운 산호를 볼 수 있는 다이빙 포인트를 정리한 기사 중에서 이곳 세부의 다이빙 포인트로 여행 온 일본인 할머니 두 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인터넷의 시니어 다이빙 클럽에서 만나 이곳까지 다이빙을 하러 온 65세의 할머니들, 늦게까지 취미생활을 가꾸어 삶을 풍부하게 영위하는 그들의 기사를 읽으며 진정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한국에 돌아오니 입춘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에어컨을 틀 었던 영상 30도에서 꽁꽁 싸매도 추운 영하 10도까지의 환경에 적응하는 인체가 대단하다. 그래도 서울보다는 영천이 훨씬 따뜻하다.남편과 나는 이곳에 내려올 때 과수원을 조성하려고 했었다. 그 중간에 세 홀 정도의 귀여운 미니 골프장을 만들면 어떨까? 아이들이 일찍부터 골프를 접할 수 있게 동물 모양의 조형물이 들어간 깜찍한 미니 골프장은 어떨까? 세부에서 만난 소년소녀의 모습이 눈에 어렸다. 여행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여행과 영감에 찬사를! (2018년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