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乙巳年)을 보내고 다시 병오년(丙午年)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경북동부신문 독자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한해는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나라 전체가 들끓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선은 나 자신의 어깨근육파열과 요관암이라는 신체적 병증치료로 보낸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덕택으로 수행자로 살고자 먹은 마음을 추스르는 계기가 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불법의 핵심인 삼법인三法印(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과 사념처관四念處觀(관신부정觀身不淨, 관수시고觀受是苦, 관심무상觀心無常, 관법무아觀法無我)의 위파사나 명상을 통해 내면의 세계에 좀 더 깊이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항암치료의 통증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할 즈음에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입장에 서서 담담하게 바라보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한 순간 정리(整理)라는 단어에 매달리는 나 자신이 보였습니다. 그도 잠시 뿐, 특별히 정리하고 자시고 할 인생이 못 됨을 알아차리고 담담히 병원치료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한 갑자(甲子)를 살고 다시 한 갑자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자동차 엔진보링처럼 신체보링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지요. 아직 얼마의 보링기간을 거쳐야 할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새로운 인생의 시작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행히 고도로 발달한 의학(醫學)의 덕으로 항암제 투여로 빠진 머리카락이 새로 나면서 윤기를 회복하는 것을 보면 정상을 회복하는 날이 멀지 않은 느낌입니다. 신년 벽두에 서서 다시 일상의 생활을 회복하고 온전한(?) 삶을 향해 출발합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김상구(金相龜) 의사 공훈록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성오(成五), 이명은 김상규(金相奎) 혹은 김고성(金高城)이라고도 하였다. 1855년 6월 17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상읍(上邑, 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上邑里))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고종의 시종관(侍從官) 정환직(鄭煥直)의 아들 정용기(鄭鏞基)는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 벗들과 의논하여 고향마을 경북 영천군(永川郡) 검단리(檢丹里)에 영천창의소(永川倡義所)를 차리고 통문과 격문을 배포하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창의소 본부의 이한구는 청송, 정순기는 영해(寧海), 이규필(李圭弼)은 흥해(興海) 등으로 나아가 각지 의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때 이규상(李圭相)·오수희(吳壽羲)·김찬묵(金餐默)과 함께 청하(淸河) 지방에서 의병 모집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경북 영천에서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는 산남 의병부대가 결성되었다. 산남 의병부대는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북상한다는 목표로 여러 지대(支隊)로 나누어 1906년 (음)3월 5일부터 영천·청송(靑松)을 거치며 진군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본진 서기(書記)로 종군하면서 진중일기(陣中日記)를 전담하여 작성하였다. 그러나 1906년 (음)4월 28일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대장 참령(參領) 신석호(申錫鎬)의 간계에 속아 정용기가 대구 감영에 구속되었다. 부친 정환직의 주선으로 곧 풀려난 정용기는 1907년 4월 영일군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다시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이 무렵에는 그의 아들 김하회(金河回)도 종군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산남 의병부대 지도자들이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정환직이 남은 병사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다시 일으켰으나, 강원 강릉(江陵)으로 북상 중 일본군에 잡혀 1907년 12월 경북 영천에서 총살 사망하였다. 정용기·정환직 양대 대장을 잃자 새로운 각오로 동지 수십 명과 함께 기호지방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충청북도 단양(丹陽)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1908년 4월 7일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오치운본관은 해주이고 의성에 살았다. 1907년 정미에 산남의진으로 들어왔는데 뒤에 최세한의 참모로 종사하였다. 험난함과 어려움을 피하지 아니하여 자못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나 최세한 대장이 사로잡히자 만주로 건너갔다.〈원문〉吳致雲은 海州人이요 居義城이라 丁未年에 入陣하고 後爲崔世翰參謀從事하야 不避險難하고 頗得衆心이러니 及崔大將被執에 渡滿洲하다 <山南倡義誌 卷下65p>吳致雲 義士 略歷(오치운 의사 약력)吳致雲(오치운)은 관향은 海州(해주)요 義城(의성) 出身(출신)이라 丁未年(정미년)에 입진하였고 戊申年(무신년)에 참모종사로 활약하다가 후에 滿洲(만주)로 移居(이거)하다 <山南義陣遺史4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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