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복판, 경북 영천의 들녘을 지나다 보면 누구나 경이로운 풍경 앞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산지로 둘러싸인 이 내륙의 분지에서 뜻밖에도 거대한 바다의 잔상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푸른 물결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펼쳐진 마늘 밭의 흰색 멀칭(Mulching) 비닐이 만들어낸 눈부신 은빛 물결, 필자는 이를 감히 ‘만경백파(萬頃白波)’라 부르고 싶다.본래 만경창파(萬頃蒼波)라 함은 끝없이 넓고 푸른 바다를 일컫지만, 지금 영천의 겨울은 그 푸른색을 지우고 온통 백색의 바다로 갈아입었다. 보현산과 채약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칼바람이 들판을 휘저을 때마다, 팽팽하게 당겨진 흰 비닐들은 일제히 몸을 떨며 나부낀다. ‘쏴아-’ 하고 비닐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우면, 마치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해변에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자연의 바람과 농부의 손길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오직 영천에서만 볼 수 있는 역동적인 장관이다.하지만 이 ‘만경백파’는 단순히 시각적인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다. 그 나부끼는 비닐 아래에는 매운 추위를 견디며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영천 마늘의 강인한 생명력이 숨 쉬고 있다. 흰색 멀칭은 햇빛을 반사하여 지온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주면서도, 밤사이 땅이 꽁꽁 얼어붙지 않도록 온기를 붙잡아두는 ‘생명의 이불’ 역할을 한다.비닐 겉면은 바람에 비명을 지르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지만, 그 아래 흙 속은 의외로 고요하고 포근하다. 겉은 격렬한 파도이나 속은 깊은 인내의 시간인 셈이다. 영천 마늘이 유독 알이 굵고 육질이 단단하며 향이 짙은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전국 최고의 일조량과 분지 특유의 혹독한 겨울 추위라는 이중주 속에서, 마늘은 스스로 세포 조직을 치밀하게 다지며 알리신 성분을 축적한다. 저 거친 ‘백파’의 소란을 견뎌낸 마늘만이 비로소 돌처럼 단단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영천의 명품 마늘로 거듭나는 것이다.필자는 바람에 펄럭이는 저 흰 비닐들이 대지라는 배 위에 달린 수만 개의 돛처럼 보인다. 그 돛들은 차가운 북풍을 동력 삼아, 보이지 않는 땅 밑에서 ‘봄’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항해하고 있다. 농부들은 그 돛이 찢어지지는 않을까,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겨울 들판을 지킨다. 결국 장관(壯觀)이란 단순히 화려한 색채가 아니라, 그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붓는 인간의 정성과 자연의 인내가 만날 때 완성되는 것이다.오늘도 영천의 들판은 은빛 파도를 일으키며 다가올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혹시 삶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 이가 있다면 영천의 만경백파를 보러 오시라.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기어이 온기를 품고 흔들리며 전진하는 저 하얀 물결이, 당신에게 작지만 강렬한 위로를 건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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