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구리(9)망치질이 자욱한 마을 입구까지 안내해준 상선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바깥으로 내보내는 손짓으로 많이 섭섭했지만, 강경한 ‘내침’ 앞에서 어쩔 수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저토록 대쪽인 줄 알았다면 보현산 어딘가에 헤매게 두고 왔을 것이다. 산길을 여는 심마니의 위용을 능히 짐작하도록 배움의 길에 끌어들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약간 무안한 몇 걸음을 옮겼을 때 꼭지를 잡는 설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손나팔을 하고 있는 설란의 모습은 여전히 강경했다. “그쪽이 내 처녀를 취한 것을 잊지 마소. 셈을 해도 밑진다고 생각하지 마소. 사실 난 대장장이를 흠모한 까닭에 두마국(國)을 벗어나야겠다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큰 나라에 가면 마음에 차는 대장장이를 분명 만난다는 확신으로 여기까지 왔소. 섭섭하고 원망스럽다 생각마시고 다른 인연 찾아가소. 혹여 그쪽 씨앗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어도 반듯하게 키워놓을게요. 어느 마을을 지나치다가 그쪽 닮은 아이를 보게 되면 머리를 쓰다듬거나 엉덩이 한번 때려주소. 그것이 이승의 인연이라 매듭짓고픈 마무리라 생각하소. 너울너울 당겨서 가소.”언제부터, 어떻게 하여 대장장이 바라기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설란은 온몸으로 내치고 있었다. 더 붙들고 기웃거리면 그나마 맺은 속정이 옅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로 상선도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녁의 올곧은 심지가 그렇다면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것이 심마니가 갖춰야하는 소양일 터. 잘 있으시게. 대장장이다운 대장아이를 만나 한세상을 누리다가 두마국으로 다시 넘어갈 길잡이를 찾게 되면 한번쯤 생각해주시게.” 상선이 떠난 자리가 갑자기 커 보였지만 설란은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을은 파발마가 쉬어가는 중간지점으로 몇 군데 대장간이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말굽편자와 도읍지로 올려 보낼 칼과 창과 화살촉을 넉넉하게 보유해야 할 저마다의 소임에 바쁜 모양새로 분주해 보였다. 설란의 아비는 두마국에서 대장장이였다. 한때 정권쟁취를 위한 피바람이 몰아칠 때 반대편에 선 덕분에 능지처참을 당하고 설란은 염전에 내동댕이쳐졌다. 버려진 만큼이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먹이를 구해 온전히 살아남을 자력갱생(自力更生)으로 죄목이 정해졌다. 여식(女息)이기에 살아남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허기를 달랬고 염전에 매달려 소금수확에 일손을 보태면서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설란의 품속에는 대장간에서 빠질 수 없는 모루를 누구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었다. 망치로 두들겨 단조(鍛造)할 때 밑에 받치는 돌이 곧 모루이며, 복수는 모루로부터 시작된다고 굳게 믿었다. 내구성(耐久性)이 높아서 쇠를 두드릴 때 충격을 분산시켜 육신을 보호하고, 쇠의 변형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그렇다고 무거운 모루를 정말 품고 싶었지만 실상은 그럴 수 없어서 아비의 대장간이 쑥대밭이 되던 그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모루조각을 숨겨두었다. 그 돌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강암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비의 복수를 위해 대장장이를 지아비로 둔다는 계획안에 설란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심마니 상선을 과감히 떨쳐내고 신라의 저잣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기어코 몇 군데 대장간을 물색하고, 가장 젊고 기세충천(氣勢衝天)한 목표가 설정되었다. 반드시 복수를 위한 첫걸음은 대장간에서 시작된다고 굳게 믿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