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가면 1983년 문화재청에 의해 사적 302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주요 전통민속마을인 읍성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역사는 문헌상으로 보아 마한 시대부터이며 백제 성왕 대에는 파지성(波知城)이라 불렀고 고려 태조 대에 이르러 낙안국으로 개칭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 하자 조선 초 태종 대에 토성(土城)을 쌓았고 세종 때 다시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으며 인조 대에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다시 중수하였다. 이 마을은 옛 부터 어염시초(魚鹽柴草)가 많아 생활에 불편함이 없었고 지금도 주변 부락에 비해 소득이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말 도선국사는 이곳을 천장지비(天藏地秘)라 일컬으며 사대부가 많이 배출될 곳이라 예언하였고 사방으로 버릴 것 하나 없는 지맥이 무수히 숨어 있다고 하였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의 장수군 영취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나온 호남정맥이 장흥과 보성을 가르면서 다시 북동진하여 계속 뻗어나가다 섬진강을 만나면서 그 행로를 마쳤다. 낙안읍성은 호남정맥의 순천시 외서면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낙안면의 금전산(668m)을 일으켜 이 마을의 주산이 되었다. 마을 좌우에는 오봉산(580m)과 제석산(550m)이 좌청룡이고 우백호는 존제산(650m)이다. 안산은 마을 앞 들판을 지나 나즈막히 봉긋 솟은 옥산(90m) 이지만 앞쪽 여자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수세는 마을 뒤 금전산 양측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마을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갈라져 흐르면서 생기를 보호해주고 벌교읍 지동리에서 다시 합수하여 마지막 여자만으로 흘러든다. 이와 같이 이 마을은 물길의 모양이 전형적인 행주형국으로 읍성 한가운데에 있는 은행나무를 돛으로 삼았고 닻은 향교의 뒷산이며 성곽을 따라 서 있는 노거수를 노(棹)로 보아 형국의 완성을 이루었다. 읍성 마을은 형국의 특성상 우물을 파지 않았고 자연스레 솟아오른 여러 옹달샘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배 안으로 들어온 물을 퍼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이 마을은 성곽의 형태가 마치 도끼처럼 생겼다 하여 금부형(金斧形)이라고도 하는데 도끼날은 동쪽 방향이고 도끼뿔은 서쪽의 대밭이며 자루는 남문에서 옥산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동쪽의 왜구를 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읍성에서 서문을 지나 외서로 가는 고개를 빈계재(贇鷄峙) 혹은 금계(金鷄)라고도 불러 성곽은 둥지요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들을 알로 보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 터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형국이 다양하다는 것은 이 마을이 그만큼 풍수적 명당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을 뒤쪽의 서북쪽이 허(虛)하다는 단점도 있으나 이는 대나무를 심어 비보(裨補) 하였고 이 대나무 숲은 왜구와의 싸움에서 무기가 떨어졌을 때 화살촉을 만들어 유용하게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이 외에도 풍수 비보 물로는 성곽 주위에 해자(垓字)가 있어 물길을 보완해주고 동문 앞에 삽살개 석구상(石狗像)은 동쪽 오봉산의 험한 기운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비보(裨補)란 풍수적 결함이 있는 땅을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길지화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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