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것을 싫어하고 뭐든 쉽게 해결하려 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일까요? 올해는 말띠 해입니다. 그것도 적마(赤馬), 붉은 말의 해라고 하죠. 왜냐? 병오년(丙午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는 을사년(乙巳年)이었는데 청사(靑蛇)-푸른 뱀띠의 해라고 했어요. 답은 10개의 천간(天干)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양사상의 중심에 있다 할 5행설(五行說)에서 기인합니다. 5행(行)과 5색(色)과 10간(干)은 목(木)-청(靑)-갑을(甲乙), 화(火)-적(赤)-병정(丙丁), 토(土)-황(黃)-무기(戊己), 금(金)-백(白)-경신(庚申), 수(水)-흑(黑)-임계(壬癸)로 연결되어지죠. 이해를 돕기 위해 올해의 띠인 말[馬]을 가지고 이야기해 봅니다. 12년 전인 갑오년(甲午年)이나 12년 뒤에 오는 임오년(壬午年)은 무슨 색깔의 말일까요? 위 연결선을 가지고 설명해보면, 갑오년(甲午年)은 청마(靑馬:푸른 말)의 해, 임오년(壬午年)은 흑마(黑馬:검은 말)의 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10간(干)이 다섯 가지의 색깔을 결정하고 12지는 열둘의 띠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더러 모임의 자리에서 왜 올해가 붉은 말의 띠라 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해보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들어갈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할 테지만 덧붙여보자면, 오행은 다섯 가지 색깔[五色] 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및 중앙의 다섯 방위[五方], 우리 몸의 장기인 오장육부(五臟六腑), 사계절, 다섯 가지 맛[五味], 청룡(靑龍) 주작(朱雀) 백호(白虎) 현무(玄武)의 사신(四神) 등 우리의 일상과 의식세계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의 경우 현대사회 교육체계의 허점으로 인해 학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동양 가운데 중심이 되는 한민족의 후손이고 바야흐로 K- 로 대변되는 한류(韓流)가 세계의 문화를 선도해가는 즈음입니다. 선진국이 경제가 아닌 국민의식의 수준을 그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 모두가 일반상식의 수준을 좀더 고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60대인 나도 나이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요즘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부단(不斷)의 노력을 해야겠네요.류만리관향과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다. 누군가 죽장면 가사의 장곡산에서 전사했다고 말했다.〈원문〉柳萬里는 貫鄕及居所不詳이라 或曰戰死於竹長佳士壯谷山이라 <山南倡義誌 卷下67~68p>柳萬里 義士 略歷(류만리 의사 약력)柳萬里(류만리)는 관향과 거소는 미상이라 竹長(죽장) 佳士(가사)서 전순하다 <山南義陣遺史511p>김을문관향과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다. 죽장면 두곡에서 전사하였다.〈원문〉金乙文은 貫鄕及居所不詳이라 戰死於竹長頭谷하다 <山南倡義誌 卷下68p>金乙文 義士 略歷(김을문 의사 약력)金乙文(김을문)은 관향과 거소는 미상이라 竹長(죽장) 頭谷(두곡)에서 전순하다 <山南義陣遺史512p>김운달관향은 분명하지 않으나 죽장면 개일에 살던 사람이다. 청하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원문〉金運達은 貫鄕不詳이고 竹長開日居人이라 或言戰死於淸河라 <山南倡義誌 卷下68p>金運達 義士 略歷(김운달 의사 약력)金運達(김운달)은 관향은 미상이오 竹長(죽장) 開日(개일) 出身(출신)이라 淸河邑(청하읍)을 공격하다가 전순하다 <山南義陣遺史512p>강봉은본관은 진주이나 살던 곳은 분명하지 않다. 대구감옥에서 죽었다.〈원문〉姜鳳殷은 晉州人이요 居所不詳이라 死於大邱獄하다 <山南倡義誌 卷下68p>姜鳳殷 義士 略歷(강봉은 의사 약력)姜鳳殷(강봉은)은 관향은 晋州(진주)이고 거소는 或言(혹언) 永川(영천) 守城(수성)이라 피집되어 大邱(대구)에서 사형되다 <山南義陣遺史512p>姜鳳鶴(강봉학) 의사 공훈록1890년 3월 8일 경상북도 흥해군(興海郡) 북안면(北安面) 수성리(守城洞, 현 영천군 북안면 수성동)에서 아버지 강규수(姜奎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죽암(竹岩)이다. 초명은 강봉대(姜鳳大)이고, 또 다른 이름은 강봉은(姜鳳殷)이다. 1906년 3월 창의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였다. 1907년 9월 창의장 정용기(鄭鏞基)가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전사한 이후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제2대 대장으로 취임하자 그 휘하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10월 29일 흥해군을 습격하여 우편취급소를 불태우고 우편취급소장 등 3명을 사살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신녕(新寧)을 기습하여 경무분파소(警務分派所)에 보관된 총기 60여 점을 노획하였다. 11월 16일에는 흥해를 습격하여 경무분파소를 포위·공격하고 일본인 순사 권차저지차랑(權次猪之次郞)과 한국인 순사 정영필(鄭永弼)을 사살하였다. 또 12월 7일에는 영덕의 일본군을 기습하여 20여 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1908년 12월 20일 포항헌병분견소에 자수하여 1909년 2월 24일 이른바 폭동살인죄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받았다. 이후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13년 11월 4일 형기를 다 마치지 않은 채 가출옥 석방되었다. 그 뒤에도 다시 영일·영천 일원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함께 활동하던 어천식(魚千植)이 체포되어 이른바 절도·강도·강도살인 협의로 기소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주하였다. 1914년 6월 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0월 14일 대구감옥에서 25세의 나이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006년 11월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永川抗日運動宣揚事業會)에서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용산리(龍山里)에 애국지사진주강봉학추모비(愛國志士晉州姜鳳鶴追慕碑)를 건립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