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구리(12)계절 겨울이 삭정이처럼 말라붙은 채 내내 용을 쓰지 못할 것처럼 들판에서부터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가을 알곡을 지켜주던 허수아비는 한 계절을 넘기고 저토록 생기를 잃은 모습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애물단지로 추락했다. 마치 이 광경이 한 넝쿨처럼 느껴졌다. 홑씨로 세상을 떠돈 민들레에서부터 냉이며 달래가 새삼 싹을 틔웠고, 하늘을 벗 삼아 노고지리가 아래에서 치받아 우지 짖고 있었다. 토실한 햇살이 몇 순배 다녀가면 곧 봄이 온다고 다들 믿었다. 연분홍 철쭉이 산허리를 휘감아 보현산을 울울창창(鬱鬱蹌蹌) 수놓을 때 바지랑대로 떠받친 하늘은 자신의 덩치를 낮추고 있었다. 언제나 방심할 시기에 꽃샘추위는 무심히 스치는 길섶을 타고 낮고 강하게 몰려들었다. 춥다며, 도끼질로 걷어 부친 팔소매를 내렸고 한껏 벼르던 집수리를 향한 망치질을 잦게 만들었다. 모처럼 기지개를 켜던 만물은 다시 움츠려, 세상을 바라보는 눈매는 매몰찬 회색에 가까운 변신으로 저마다 독기를 품었다. 이때쯤엔 너나없이 우물냉수 한사발로 보릿고개를 이겨내는 중이었다. 보현산을 맘껏 발아래에 두던 범(虎)도 예외 없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마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마에 달라붙은 고드름의 끝날 같았고, 빠르게 북상하는 매운바람 같았고, 널뛰는 여인네의 치맛자락 같은, 그 소용돌이를 온전히 내뿜는 범의 우렁찬 일갈(一喝)에 천하(天下)는 숨을 죽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나 진정성으로 다가오는지, 뒷간에 앉은 허연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회초리와 맞먹는 강렬한 매서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어깨는 움츠려들었고 주린 배는 오래 멈추지 않을 울렁증으로 진저리를 쳤다. 감히 문밖을 나설 수도, 문밖을 훔쳐볼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전 재산과 맞먹는 몇 남은 돼지우리면 어떻고 외양간이면 어떠하랴. 이미 산신령처럼 우상(偶像)숭배에 이른 범의 안위(安位)가 더욱 걱정이 되었다. 두려움에 떨지만 경배(敬拜)하는 마음으로 마을백성들은 송두리째 내어주고 있었다. 다만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키워온 가축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의미에서 먹잇감을 덥석 물었을 때, 단 한번으로 숨통을 끊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팽배(澎湃)해 있었다. 피바람이 한차례 쓸고 갔는지, 이리 튀고 저리 튀던 외양간 쪽이 조용해졌다. 싸리나무 울타리를 훌쩍 넘는 덩치 큰 기운의 그림자가 걷힌 뒤 다시 어둠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을백성 벽보는 여전히 떨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문고리를 잡은 손에 온힘을 기우려가면서 최대한 느리게 미닫이문을 열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바람은 그렇다 치고, 싸리나무 울타리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범의 기운이 느껴져 더욱 코끝이 시려왔다. 하체가 요란하게 떨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소를 물고 갔는지, 돼지를 물고 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은 혹시 그 소란에 다치기라도 했을 남은 가축을 돌봐주고 싶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한걸음을 걷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도끼를 바투 움켜잡았다. 조금은 진정이 되는 자기최면을 곱씹으며 짐승우리 앞에 섰다. 벽보는 거침없는 범의 기운을 전달받고 있었다. 저토록 겁에 질린 모습에서, 웬만하면 영역을 최대한 확보하던 돼지들의 기세는 어디가고 짜그리고 포개진 채로 싹둑싹둑 잘린 울음소리를 내뱉는 모습은 조금 전 상황을 여과 없이 말해주었다.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범이 왕래한 돼지우리에서 겁에 질려 죽어간 두 마리가 더 나온 뒤 안정세로 돌아섰다. 그런 범이, 벽보의 집을 황송하게도 다녀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