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말기에 백련교도(白蓮徒)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홍건(紅巾)의 난(亂)’에 참여했던 주원장은 곽자흥(郭子興)의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곽자흥이 죽자 그의 세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1356년에는 남경(南京)을 점령해서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뒤이어 1363년에는 진우량(陳友諒)의 세력에 승리했고, 1367년에는 장사성(張士誠)의 세력에도 승리하여 강남 지역을 모두 평정했다. 그 뒤 그는 1368년 정월에 응천부(應天府)로 이름을 바꾼 남경에서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대명(大明),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하였다. 무신(戊申)년 부사(副使)인 이용(李容)이 창건하였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이르기를 “영천은 경상도의 아름다운 고을이니 나의 고향인 대구와 멀지 않다. 무진년에 나는 영천 태수였던 손사성(孫士晟)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고을을 일컫기를 영천이라 함은 이수(二水)의 뜻에서 취하였으니, 아마도 두 물(二水)은 모자산(母子山)1349)1349) 영천의 북쪽에 위치하면서 청송과 경계를 이루는 산. 보현산. 본래 모자의 모(母)는 보현산을 가리키고 자(子)는 보현산 앞에 있는 기룡산을 가리킨다.에서 발원하여 두 갈레로 나뉘어 꺾이면서 남쪽으로 흘러 고을(郡) 앞에 이르러 합해져 하나가 되었기에 고을의 이름을 지은 것이리라’고 하셨다. 선생께서는 나를 이끌어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았다. 나는 시험 삼아 산천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광의 개략은 보았지만, 다락(명원루)의 모습은 그리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지난 임술년 가을 나는 사신이 되어 영천에 이르렀더니 군수이신 김덕원(金德源) 선생이 나를 맞으시기에 나는 다락에 올라 하루 종일 술과 시를 읊었었다. 다락 모양과 제도가는 넓고 통창하여 탁 트였으며 단청의 현란함이 과거 보다 다르다. 이는 지난 태수였던 정차공(鄭次恭) 공이 새로 지은 것이다. 을미년에 나는 사신으로 다시 지나가게 되었고, 지난 무술년 가을 남도를 순찰하면서 두루 이름난 다락들을 방문하였으니,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말양의 영남루(嶺南樓)와 울산의 태화루(太和樓) 양산의 쌍벽루(雙碧樓)와 김해의 연자루(燕子樓)로, 이들은 모두 각기 이름을 드러내었으며, 이 다락의 빼어남 또한 가히 그들 빼어난 풍광의 다락들 사이에서 백중(伯仲)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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