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구리(16)주용은 추명의 하문(下問)에 잠시 망설였다. 이내 단호하고 결기에 찬 목소리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지만 머리는 조아린 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인근 어디쯤에, 우물 벽을 타고 쇠약한 나뭇가지 하나가 떨어져 마침내 당도하는 저녁나절 유시(酉時)였다. 조금은 용감해도 될 노을 번짐이 서산마루를 물들이고 있었다. 한차례 이른 어둠을 타고 소쩍새 울음이 들려왔다. 잠시 멈춰도 이상할 것 없는 솟쩍 솟쩍 소쩍새의 울음에 한쪽이 기울어진 채로, 날이 바짝 선 말을 쏟아 내는 주용은 거침이 없었다. 한 나라를 쥐락펴락해도 남음이 없는, 어금니를 깨문 그런 자세였다.“세자저하, 이제 읽히지 않는 소인의 마음을 가감 없이 열어 보일까 합니다. 선례(先例)라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동명세자를 처단해야 옳으나 그 또한 평생을 안고가야 하는 부채(負責)로 남아 마음의 상처가 될 우려가 큽니다. 이에 입각(立脚)하여 선친의 승하(昇遐)에 맞춰 처단형식을 빌리지만 유배의 길로 오르게 하심이 타당할 줄 아옵니다. 훗날 마을 백성들이 알게 되어도 형제애를 중시 여기는 저하의 너그러움에 반기를 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동명세자께서도 은혜를 안고 살아가실 겁니다.”“솔직히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어 고맙구나. 눈에 띄지 않고 적당하게 고립된 유배지로 떠오르는 곳이 있느냐?”“양지부락과 두들부락과 대태부락과 굼돔부락과 평지부락 중 택일(擇日)하라 말씀이지요? 저는 굼돔부락을 꼽겠습니다. 숲이 우거져 낮밤이 혼미하고 무엇 하나 뚜렷한 건더기 없이 세월을 보내기는 안성맞춤이지요. 거기다가 궁녀를 딸려 보낸다면 한세월을 막힘없이 보낼 줄 아옵니다. 계절마다 먹거리를 날라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미약한 제 소견을 감히 피력했을 뿐입니다.”“주용이가 알고 보니 책사(策士)였구나! 내가 합하에 오르게 되면 궁녀에, 누구보다 곁에 두고 책사의 소임을 맡길 것이다.”눈물을 보이는 주용의 뺨이 반들거렸다. “받들겠나이다.”이 계략이 있고 아흐레 지난 병오년(丙午年) 자시(子時)에 두마국의 3대 합하가 승하했다. 각 부락마다 평상시 한 개의 봉화대를 뛰어넘어, 세 개의 봉화대에서 불꽃과 연기가 솟아올랐다. 부락 초입에는 승하 소식을 담은 방이 붙었고, 마을 백성들은 하나같이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모여 들었다. 새벽이 움트는 시각에도 횃불을 곳곳에 밝혀, 아득히 먼 곳에 오르는 합하의 장서(長逝)에 예를 다하게 했다. 그런 와중에 밀명을 받은 주용은 호위대장 태열을 만났다. 이미 대신들로부터 차기 합하의 승계는 셋째 추문이 적임자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첫째 춘명은 곧 날을 받아놓은 병중이었고 둘째 하명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진지 오래였고, 셋째 추명만이 명약관화한 적임자로 따르는 자가 수백이었고, 넷째 동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모양으로 무엇 하나 장담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주용이 가지고 온 밀명은 벗어날 수 없는 머리깨나 아픈 막중한 임무였다. 태열은 우렁차게 짙은 눈썹에 큰 눈을 굴렸지만, 뒤로 물러설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추명 합하의 명인가?”“한 치의 소홀함 없이 분부를 받들 것이라 했습니다.”“동명 세자의 의복을 걸친 허수아비의 목을 잘라 부락 초입에 걸쳐두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바윗돌 같은 범을 때려눕힌 호위대장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살아있는 동명세자와 궁녀 소옥을 변장시켜 눈에 띄지 않게 유배지 굼돔부락으로 호위하라는 하명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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