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의 세 가지 행위로 습관을 만들고, 습관적으로 행위를 반복함으로서 자신만의 업(業)을 쌓아갑니다. 이 업 덩어리를 업식(業識)이라 하는데 이것이 곧 ‘나’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의식작용에 의해서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빛깔과 모양을 보고, 귀가 소리를 듣고, 코가 냄새를 맡고, 혀가 맛을 보고, 몸이 촉감을 느끼는 것들이 먼저 우리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경험치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따른 좋은 느낌은 유지하거나 더 가지려 하고, 싫은 느낌은 멀리하거나 거부하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버릇으로 굳어져서 나의 독특한 성격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사람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 끊임없이 이것을 되풀이하여 지금 이 순간의 ‘나’를 형성합니다. 버릇이 들면 쉬이 하게 되고 무의식 상태에서 그 버릇이 행동으로 나타날 정도가 되면 바꾸기 어려운 업 덩어리가 되는 거죠. 그리고 죽어서 다시 태어났을 때 이 업 덩어리가 남아 있는 정도에 따라 이생은 전생의 연결 선상에 놓이게 됩니다. 사람마다 학습능력이나 기억력의 차이가 있듯이 전생의 자기 능력을 현생에서 기억해 내는 것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요즘 아주 어린 나이의 트롯 천재들을 보면 전생으로부터 익힌 그 업식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어쨌거나 중생은 이 업의 힘이 이끄는 대로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를 반복합니다. 이를 업의 힘에 지배당해서 살아가는 중생이라는 뜻으로 업력중생(業力衆生)이라 합니다. 이에 반해 어떤 이는 강렬한 의지를 일으켜 그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이를 願力(원력)에 의한 삶이라 합니다. 자신의 의지를 일으켜 습관을 과감히 끊어내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원력보살(願力菩薩)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체의 번뇌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대자유인인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자들끼리는 “성불(成佛)하세요” 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붓다의 말씀에 의하면,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졌으니 원력을 일으켜 업력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인과(因果)의 이치에 따라 부처의 씨앗을 심어 불과(佛果)를 이룰 것입니다. ‘나’와 ‘나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공(空)하므로 중생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信]과 앎[解]은 행위[行]를 향한 기초가 되어 궁극적인 목표[證]를 추구해가는 수행의 삶을 만들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최병국자는 경팔이고 본관은 월성이며 문창후(최치원)의 먼 후손이다. 대세가 실패한 이후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원문〉崔炳國은 字景八이요 月城人이라 文昌侯之遠孫也라 大勢敗後에 率妻子渡滿洲하다 <山南倡義誌 卷下70p>崔炳國 義士 略歷(최병국 의사 약력)崔炳國(최병국)은 字(자)는 景八(경팔)이요 관향은 月城(월성)이라 義兵(의병)운동이 전말되고 滿洲(만주)로 移居(이거)하다 <山南義陣遺史516p>손영술자는 화실이고 본관은 월성이다. 누군가 초장(哨長)이었다 말하지만 그 전말(顚末)은 명확하지 않다.〈원문〉孫永述은 字和實이요 月城人이라 或言爲哨長이고 顚末不詳이라 <山南倡義誌 卷下70p>孫永述 義士 略歷(손영술 의사 약력)孫永述(손영술)은 字(자)는 和實(화실)이요 관향은 月城(월성)이요 出身地(출신지)는 竹長縣(죽장현) 梅峴(매현)이라 入陣(입진)하여 哨長(초장)으로 활약하였다 別來峴(별래현)에서 왜적들에게 피집되어 淸河(청하)옥에 감금되었다가 도탈한 일도 있으며 一時(일시)는 왜적들이 그의 母親(모친)과 夫人(부인)을 拉致(납치)하여 두고 돈 千金(천금)과 郡守(군수) 한 자리를 준다고 편지를 써서 夫人(부인)을 시켜 편지를 전달했다 公(공)은 편지를 보고 최후까지 항전할 의사로서 답장을 하고 夫人(부인)에게 경계하기를 다시는 이러한 술책에 속지 마라 하고 夫人(부인)을 보냈더니 그 후에 母親(모친)은 獄死(옥사)하였고 부인은 석방되어 옛집 불탄 터에서 목을 매여 죽었다고 日月(일월)향지에 기록이 있더라 편지의 내력은 생략하였고 그 후 전말은 미상이라 <山南義陣遺史516p>손영술의사 공훈록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 의병장이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 손내숙(孫迺叔) 등과 힘을 합쳐 거의를 준비하였다. 이윽고 정용기 의병장은 포수와 농민 등의 민병을 규합하여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적의 모략에 속아 정용기 의병장이 붙잡히는 바람에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고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출옥한 정용기 의병장은 뜻을 굽히지 않고 1907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사들을 모아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산남의진을 재결성하였다. 이후 산남의진은 해산군인을 포섭하여 병력을 보강하고 군령을 정하여 장병들을 단속하는 등 군세를 확장하고 같은 해 8월부터는 청하읍을 습격하고 청송 신성(薪城)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입암(立巖)전투에서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손영각(孫永珏), 권규섭(權奎燮) 등 전사 순국하는 패전을 겪었다. 1907년 재거의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순국하자 정환직은 아들을 이어 직접 의진을 구성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이후 정환직 의병장은 의진을 소규모 단위부대로 재편성하고 경북 일원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다수를 사살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손영술은 이와 같은 산남의진에 소속되어 초장(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별래현(別來縣)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청하현(淸河縣)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탈옥하였다. 일제는 관직을 미끼로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결국 그의 모친은 옥사하고 가옥이 소실되었으며 부인은 자결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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