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구리(17)4대 합하 추명의 등극(登極)이 있는 하룻날의 땅거미는 어둠을 요란하게 실어 나르고 있었다. 저토록 붉게 물든 서산마루가 눈에 밟혔다. 새록새록 만물을 어루만지는 어둠의 손길은 보현산 중간 턱에 자리한 암자를 휘돌고, 봄날 텃밭에 심어둔 무가 꽃을 피웠다. 노란 꽃이기에 깊은 어둠을 헤칠 각오로 범종 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즈음 동명세자와 궁녀소옥과 호위대장 태열은 남루한 복장에 길을 나섰다. 무시로 순한 바람이 들풀들을 건들고 지나갔다. “세자저하, 지금부터 호칭은 나리라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리 의복에 목 잘린 허수아비를 당산나무 둥치에 묶어두었기에, 그 앞을 지나치겠습니다. 보시면서, 살아있는 목숨이라 생각마시고 쥐 죽은 한 평생을 아끼십시오. 만약 추종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거나 왕래가 발각될시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합하의 어명입니다. 그리고 소옥은 들어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충성으로 보필하여야 한다. 나리의 그릇된 행동이 전적으로 너의 책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소옥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궁궐을 끼고 있는 양지부락 초입에 당산나무는 어제까지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당산제 제사를 드려왔다. 당제(堂祭) 제사를 올린 흔적이 지푸라기로 감싼 액막이로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두웠지만 등극한 합하의 환대를 위해 횃불을 든 마을백성들이 삼삼오오 궁궐로 향하는 밝음이 있었다. 그들 무리의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세 사람은 분명 헤지고 낡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성성하게 어둠을 깔고 누를 기운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동명은 자신의 의복을 갖추고 목이 잘린 허수아비를 똑똑히 심장에 담아두었다. 허나 이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 생각되어졌다. 돌아 갈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되는 길이라 생각되었다. 아직도 둥지를 찾지 못한 산새의 처량한 울음이, 풍경 소리와 어우러져 간간히 때리고 있었다. 소옥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왠지 서럽고 분통했다.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동명에게 자신의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산야를 뒤덮은 철쭉은 주먹만 한 눈물덩어리를 꼭두새벽으로 돌려세워주었다. 소옥의 보폭에 맞춰 맨 뒤에서 걷던 태열은 다급해졌다. 나루터에 나룻배가 보이지 않았다. 뱃사공이 나올 시각은 이르지만 항상 묶어있어야 할 나룻배가 물살에 의해 떠내려갔는지, 바닥에 구멍이 나서 가라앉았는지 나루터에서 도통 볼 수가 없었다. 혹시 매복이 아닐까하는 우려로 지팡이 속 칼을 뽑아들고 주위를 탐색했다. 자호천의 흐르는 물은 여명(黎明)의 기운을 받아, 새벽이 아침을 인도하는 햇살 부스러기들로 반짝 거렸다. 그러면서 햇살 부스러기 사이로 피라미들은 길고 납작한 몸을 앞세워 튀어 오르고 자호천이 살아있는 듯 출렁거렸다. 칼을 움켜쥐고 있는 태열의 손아귀가 저릿하게 느껴질 때 멀리 상류에서 나룻배 머리가 희끗 보이더니 세 사람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긴장을 놓을 순 없었다. 일단 지팡이 속으로 칼을 집어넣고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사공이 함빡 웃음을 지었다. 나룻배 안에 그물과 망태기가 보였다. 푸덕거리는 고기망태기를 들어 보이면서 겸연쩍게 사공은 머리까지 숙였다.“송구합니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 알았으면 기다려야 마땅한데 자투리로 한 그물 고기나 잡을 요량으로 나루터를 지키지 못했습니다.”“괜찮네. 이렇게 왔으면 되었지 않는가. 남의 이목도 있고 하니 서두르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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