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사복불언(蛇福不言)’조의 이야기를 소개해봅니다. ‘경주 만선북리의 한 과부가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한 채 배로 기어 다녔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뱀 같은 아이”라는 뜻으로 사동(蛇童), 사복(蛇伏) 등으로 불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죽자, 그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사복이 갑자기 일어나 고선사(高仙寺)에 있는 원효를 찾아간다. 원효가 예를 갖추어 사복을 맞이하지만, 사복은 예를 차리지 않고 곧바로 말하기를 “옛날 그대와 내가 경을 실어 나르던 암소(지금의 어머니)가 죽었으니, 함께 가서 장사 지내자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가 “좋다”며 사복과 함께 집으로 가, 먼저 포살(布薩)을 시켜 계를 주고 장례 의식을 준비한다. 시신 앞에서 원효가 기도하기를 “나지 말지니, 그 죽음이 괴롭다. 죽지 말지니, 그 삶이 괴롭도다.” 그러자 그 동안 거의 말하지 않던 사복이 입을 열어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 라고 한마디로 잘라 버린다. 원효는 이를 받아 “죽고 나는 것이 모두 괴롭다”는 짧은 표현으로 바꾸어 말한다.’원효와 사복이라는 두 성인이 사복 본인의 어머니 장례 자리에서 설한 ‘나고 죽는 것이 괴롭다.’ 라는 법문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네 가지 괴로움이라 합니다. 축복받는 탄생을 왜 붓다는 고(苦)라 했을까요?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향한 출발이기도 하거니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의 나를 모릅니다. 분명히 전생의 연결인데, 몸을 바꾸어 다른 누군가의 갓난아기로 태어나다 보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만큼 태어나는 순간부터 미망의 세계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제까지의 모든 삶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나’를 잃어버렸는데 자라면서 전생의 업이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앞에 무의식적인 습관들이 나타나는 거죠. 그렇게 과거의 생과 연결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한 생이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욕구가 다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의 기분은 순간순간 욕망의 성취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반복됩니다. 사실은 행복과 기쁨도 순간이요 괴로움과 슬픔도 순간인데 말이죠. 어떤 순간도 영원하지 않음을 자각하면 무상(無常)의 도리를 알아 거기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재미냐고, 사람이 기쁠 때 웃고 슬플 때는 울 줄 알아야 인간미가 있는 거라고 말하면 맞는 말씀입니다.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과 기쁨과 슬픔에 빠지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기쁜 일이 와도 기쁨에 도취되지 않고 안 좋은 일이 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슬픔에 집착하지 않아야 괴로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감정을 관조하며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그런 상태를 번뇌의 불을 끈 고요한 상태라 하고 지혜로운 자의 의식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민대평청송 사람이다. 처음 산남의진을 따를 때는 자못 여러 사람들의 칭찬이 있었으나 일이 실패한 이후 산골짜기로 몸을 숨겼다.〈원문〉閔大平은 靑松人이라 從陣之日에 頗有衆讚이런니 事敗後에 隱身於山谷하다  <山南倡義誌 卷下70p>閔時植 義士 略歷(민시식 의사 약력)閔時植(민시식)은 字(자)는 和彦(화언)이오 貫鄕(관향)은 驪興(여흥)이며 高麗(고려) 尙衣奉(상의봉) 稱道(칭도)의 遠孫(원손)이라 高宗(고종) 丁亥(정해)에 慶尙道(경상도) 慶州府(경주부) 竹長縣(죽장현) 佳士里(가사리)에서 父(부) 泳和(영화) 母(모) 宜寧南氏(의령남씨)의 長男(장남)으로 出生(출생)하다 性稟(성품)이 仁厚(인후)하고 臂力(비력)이 超人(초인)하였으며 田獵(전렵)을 좋아하고 총 쏘기를 잘 하였으므로 名射手(명사수)라고 칭찬이 있었다 이때에 우리는 국운이 좋지 못하여 난리소동이 항상 계속되었다 公(공)은 원래 충후한 성격으로서 애국심이 특별하더니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일어날 때에 어느 곳을 막론하고 엽수로 행세하는 포수들은 무조건 징발을 당하게 된다 北東大山(북동대산) 주위에 있는 百餘名(백여명)의 포수가 서로 손을 잡고 들어올 때에 公(공)은 남 먼저 지원하여 인원을 징집하고 물자를 수집하였다 山南義陣(산남의진)이 출전할 때에 항상 선두에 나서서 위험을 피하지 않고 싸웠다 四·五年(사·오년)동안 이렇게 활약하다가 말경에 강토 三千里(삼천리)가 왜놈들의 영토로 되고 민족 二千萬(이천만)이 모두 왜놈들의 노예로 되었다 公(공)은 하는 수 없어 심산벽촌에 은신하여 옛날 동지들을 더불고 地下工作(지하공작)으로 들어가서 祖國(조국) 광복에 이바지하는데 쉬지 않고 노력하였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기로 乙酉年(을유년)에 이르러서 八一五(팔일오)에 왜황 유인이 항복하고 이 땅에 왜놈들을 모두 쫓아내고 기뻐하여 건국준비에 이바지하더니 뜻밖에 국토가 분열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병으로 되어 많은 한을 머금고 丁亥年(정해년)에 이 세상을 떠나다 <山南義陣遺史466~467p>민시식의사 공훈록민시식은 경상북도 영일(迎日) 출신이다. 이명은 대평(大平)이다. 1906년 경상북도 영천(永川)에서 의거한 정용기(鄭鏞基)의병장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민시식은 영천의 동북쪽 방면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백여 명의 포수들과 함께 산남의진에 대거 입대하였다. 그리고 의병소모 및 보급물자를 모집하는 등 항상 의진의 선봉에 나서서 활약하였다. 영천·청송(靑松) 지구에서는 왜군과 수차례에 걸쳐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조인조관향은 함안이다. 전말(顚末)이 분명하지 않다.〈원문〉趙仁祖는 咸安人이라 顚末不詳이라<山南倡義誌 卷下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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