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기엔 여름처럼 덥게 느껴지던 5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3시쯤 서울지하철5호선 천호역 개찰구. 나는 그때 거기에서 정말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보았다. 온통 불신과 갈등으로 얽혀있는 요즘 세태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에 아직도 그 순간이 눈에 선하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 개찰구를 나오다말고 도움을 요청하는 기계 앞에서 호출용 벨을 눌러 역무원을 부르고 있었다. 마침 나는 모임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기에 개찰구를 나와서 그 청년의 모습을 한 동안 지켜보았다.벨 소리가 몇 번 더 울린 후 기계에서 역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무슨 일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예, 제가 승차권을 잃어버려서 나갈 수가 없어요.”“곧 가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청년은 잠시 후 현장에 온 역무원을 따라 갔다. 나도 곧 밖으로 나왔기에 그 뒤의 일은 알 수가 없다.이 청년을 보면서 나는 옛날 대학시절 고향을 오가면서 3등 열차에서 겪었던 불법 무임승차나 객차 안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던 여러 행위들을 떠 올렸다.
술에 취해 소란피우다가 공안원들과 몸싸움하던 사람들도 자주 봤다. 조악한 물건을 공안원의 눈을 피해 강매하려던 못된 상인들의 횡포도 잦았다. 그런가 하면 승차권을 안 사고 탔다가 검표원이 오면 잽싸게 피하던 사람도 봤다. 그들의 민첩함이란 혀를 내두를 정도여서 놀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막무가내는 거의 사라졌다. 그렇지만 요사이도 무례한 사람들이나 불법행위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나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기에 참 많은 일들을 겪거나 목격한다. 터무니없는 경우들을 볼 때는 혼자 화를 삭였고, 말쑥한 차림이지만 그런 외모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 얌체행위자들에게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언젠가는 술에 취해 안하무인으로 떠드는 남자 중늙은이 일행들에게 대갈일성 쏘아붙이기까지 했었다.
그런가하면 자정 가까운 시각에 만취해 쓰러진 사람 때문에 곤욕을 치루기도 했었다. 그 열차는 내가 내리는 왕십리가 종점이었는데 그 사람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기에 내가 역무원에게 인계하느라 고생했었다. 또 얼마 전엔 바로 내 앞에서 아주 날씬한 젊은 아가씨가 체크도 안 한 채 거침없이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모습도 보았다.
이처럼 아름답지 못 한 모습들에 익숙한 내게 그 청년의 행동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훌쩍 뛰어 넘어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지 않고 역무원을 불러 합법적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가? 이 청년을 보면서 나는 우리사회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극심한 불경기와 취업난, 주택난 등으로 결혼, 육아문제 등 모든 면에서 암울하기만 한 젊은 세대들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비법이나 편법대신 정도를 지키려는 이 청년에게 나는 한없는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