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게 다 그렇고 그런거 같지만 우리 사는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삽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들과 ‘이대로 계속 살 만한’ 사람들. 갈등과 싸움으로 점철된 세상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건 양편의 머릿수가 엇비슷하거나 ‘이대로도 살 만한’ 사람이 조금 더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현대사회 특히 한국 사회는 양극화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도 살 만하다”며 현 상태에 안주하는 이들이 있지요. 이 두 입장은 모두 현실에 대한 평가이며,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자문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이 양극화된 사회를 어떻게 사회적 책임의식과 공동체적 성찰에 기반해 해소해 나가느냐 하는 점입니다.‘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절규는 흔히 불평불만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불평등과 사회적 병폐에 대한 느낌에서 비롯된 비판적 자각입니다.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주거난과 소득 양극화, 교육기회의 불균형은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이나 능력 부족이라고 치부하지만 꼭 그렇게만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감정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야 합니다. 문제는 이 절규가 제도나 정치적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개인의 무력감에서 소진되고 그 절박함이 길어지면 왕왕 현실을 마비시키는 독으로도 작용합니다.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 살 만하다’는 태도는 겉보기에 안정되고 균형 잡힌 삶의 자세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때때로 ‘내 몫은 이미 확보되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다’는 냉소적 태도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변화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태도는 곧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을 방치하는 책임 회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변화의 필요를 알지 못하거나, 그것이 자신의 삶에 끼칠 불편함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침묵하기도 합니다.결국 진짜 문제는 삶의 극단 그 자체보다, 그 이면에 깔린 성찰의 결여와 공동체 감각의 부재라 하겠습니다. 절망에 머무르는 자도, 안주에 빠진 자도 모두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만 현실을 재단하고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동력을 잃게 만듭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비판이나 무기력한 수용이 아닌,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위한 실천적 성찰입니다.따라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이대로는 살 수 없다고 외친다면, 무엇을 바꾸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와 ‘당신이 이대로도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살 만함이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 성찰한 적이 있는가’를. 문제를 인식하는 데서만 멈출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과 책임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지금입니다.‘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과 ‘이대로도 살 만하다’는 안주 사이에서, 지자체는 사회적 균형과 변화의 조율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시민의 삶의 질을 살피고 조정하는 정치적 책임을 동반하는 겁니다. 다시말해 절박함과 안주 사이의 경계에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절박한 이들의 목소리를 데이트화 하는데서 끝내지 말고 ‘변화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안주하는 다수의 ‘무관심’을 견제하고, 공동체적 책임을 환기시켜야 합니다. 문제는 침묵하는 다수, 이들이 극한의 몸부림을 보이지 않는 한 세상 잘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사회란 물질적 풍요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든 적든 가방끈이 길든 짧든 구성원 간의 관계, 가치, 공동체 의식, 개인 삶의 질 등 여러 면에서 정의롭고 공정성이 인정될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선거때만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난리지만 끝나면 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