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오월은 선거를 치른 사월의 바통을 받아야 했기에 미리 바통터치를 했고 유난히 많은 행사에 연휴까지 겹쳐 긴 거리를 숨 가쁘게 달려야 했다. 오월이라는 어휘가 주는 수려함이 차츰 분주하고 복잡한 이미지로 변형된 것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의 가족행사와 학교의 수학여행,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를 치르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한다. 그 중 스승의 날 행사도 한 몫을 하였지만 요즘은 가급적 조용히 지나가기를 원하는 분위기다. 학생들이 선생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스승의 날 노래를 합창하던 운동장의 풍경은 이제 흑백사진처럼 촌스럽고 짠한 그림으로 사라지고 있다.
스승의 날 행사에 대해 교장의 의견을 묻는 담당부장에게 용기를 내어 운동장 조례를 제안했다. “학교 오케스트라를 어렵게 만들었고 많은 연습을 하던데 그들로부터 ‘스승의 날’ 연주를 들어야 하지 않나요.” 하였더니 여기저기서 조심스레 반론이 펼쳐진다. 다른 학교는 수업도 안하고 학부형과 꽃다발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 추세라며 작은 카네이션 한 송이도 청렴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걱정을 한다. 학교장의 의사결정을 도우는 선량한 교사들의 의견이라 간과할 수 없지만 내가 더 큰 용기를 내어야 했다. 며칠 전 어린이날에는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게 왕자공주를 떠받드는 하루를 보았고 어버이날에 정성껏 부모님께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던가. 이제 스승의 날이 되었으니 스승의 노래를 합창하여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마음을 전하는 전체조례가 뭐 그리 부담이 되는가?
요즘 분위기에서 교사의 권위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입는 것과 같다. 하지만 교사의 권위는 학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형식적 권위든 실질적 권위든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교사와 부모는 권위를 지키되 권위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짐하고 있는 사항이 아닌가. 우리가 언제 권위를 내세워 엉뚱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적 있는가. 엎드려 절 받는 격이라 걱정했던 스승의 날 행사였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우리 아이들은 애국가와 교가를 힘차게 부르고 명치끝 찡하게 스승의 날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은 아이들의 성장을 도우는 일에 자리매김된 것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간을 가졌고, 더 기쁘게 우리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였다.
‘교사로 살아내기’ 말이다.
운동장에 서 있는 모습만 보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오월 실루엣! 장난치고 싶고 온몸이 뒤틀리는 성장의 욕구가 마구 이글거리는 곡선의 향연!
누가 이들을 한 줄로 세워 이러쿵저러쿵 이르는가. 누가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누가 협력과 공존을 거스르게 하는가. 친구와 잘 지내는 법과 함께 힘을 모아서 이기는 법을 배우고 승패에 대해 인정하고 다른 해결책을 찾는 법을 모두 제치고 단순히 이들을 점수로 다스리려 하는가? 누가 이 고운 아이들을 한갓 자원의 일부라 일컫는가? 무엇이, 어떤 시스템이, 좋은 학교성적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사회적으로 보탬이 되지 못하는 엉뚱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이 시대에 교사로 살아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세상의 변화와 속도의 요구에 부응하며 배교를 하든지, 날카롭고 야무지게 순교를 하든지 이 시대의 교사는 끝없이 고뇌한다.
희랍신화에서 Maia는 호메로스를 낳아 기른 ‘출산과 성장의 女神’이며 ‘어머니’ 혹은 ‘유모’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로마신화로 건너오면서 ‘봄의 女神’으로 불리며 영어에서 May의 어원이 된다. 오월은 활짝 피는 탄생과 찬란한 성장을 의미한다. 오월은 마음껏 웃고 달리는 아이들의 달이며 또한 생명의 근원이 되는 어머니의 달이다. 존재에 대한 통찰과 근원에 대한 감사의 축제를 여는 달이다.나에게 오월은 고향과 어머니의 달이다.
교사로 키워준 고향의 달이며, 교사로 살아가도록 응원하는 어머니의 달이다. 이 황홀하고 엄청난 오월에 내가 있다.
오월의 고향과 오월의 엄마품에서 어설픈 교장이 안간힘을 다해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