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변에 있는 호연정에는 호연정 말고도 세 개의 현판이 더 있다. 호연정 내부에 걸린 ‘시집재(是集齋)’의 ‘是集’은 ‘호연(浩然)’과 짝이 된다. 맹자가 제자 공손추에게 ‘호연지기’는 “의를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지, 의가 갑자기 엄습해서 얻는 것이 아니[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라고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측방의 ‘이양루(二養樓)’의 ‘二養’은 ‘인의지심(仁義之心)’과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잘 기르겠다는 뜻일 것이다.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정이천의 구절에 이렇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그런데 유독 눈을 끄는 것이 좌측방의 ‘역락료(亦樂寮)’이다. 앞의 세 현판은 모두 자기 수양과 관련이 있지만 ‘역락’은 벗들과의 교유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 방의 이름은 논어의 ‘벗이 있어서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연유한다. 원문의 ‘붕(朋)’은 친구라기보다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同志)’를 가리킨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멀리에서 찾아온다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가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혼자 수양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동지들과 함께 ‘즐기[樂]’겠다는 의지가 들어있는 이름이다. 이곳 호연정은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은거하였던 곳이다. 이 현판의 이름을 보면 자기 혼자만의 수양을 위해 세상을 피해 숨은 것 이 아니라 인근 지역의 선비들과 교유하고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뜻이 컸던 것이 아닌가 한다.그는 1700년 3월 경주부윤을 사직한 후 이곳 호연정에 머물기 시작해서, 1702년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영천으로 돌아왔고, 1705년 영광군수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또 영천으로 돌아왔다. 1710년에는 선조인 효령대군의 사당을 중수하기 위해 상주로 이사하기는 하였으나 일을 마친 5년 후 다시 영천으로 돌아왔다. 1728년 인천의 조카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병와는 줄곧 영천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였다. 영천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매번 영천으로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병와선생은 호연정에 머물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영양록(永陽錄)’, ‘갱영록(更永錄)’, ‘영양속집(永陽續集)’ 등 제목에서도 영천에서 저술했다는 사실을 뚜렷이 드러내는 문헌들도 있다. 동래부사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일본지리지 ‘동이산략(東耳刪略)’, 고려 속악을 정리한 ‘악학편고(樂學便考)’, 한자학을 다룬 ‘자학(字學)’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가장 알려진 ‘남환박물(南宦博物)’같은 저술은 영천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저술과 비교한다면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채제공(蔡濟恭)에 따르면 영천과 경주 두 고을의 선비들이 문집 18권을 편집하고 간행하려고 서문을 받으러 왔다고 한다. 병와선생의 학문적인 영향은 영천 뿐만 아니라 인근의 경주까지 미쳤던 것이다. 이렇게 방대하고 다양한 저술과 영향력을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다산 정약용(丁若鏞) 밖에 없을 것이다. 다산은 강진의 초당에서 10여년 유배생활을 보냈지만, 병와선생은 적극적으로 영천에 우거(寓居)하여 30년 가까이 지냈다. 지역에 미친 영향은 다산보다 훨씬 더했을 것이다. 그리고 호연정이 다산초당보다 훨씬 활발한 학문 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금요일 호연정에 대구와 다른 지역에서 몇몇 학자와 지사, 후손들이 모여들었다. 필자 역시 병와선생을 연구했던 경험이 인연이 되어 자리에 함께 하였다. 점심을 같이 하며 병와선생의 생애와 학문을 얘기하는 자리가 되었다. 비록 큰 모임은 아니었지만, 병와선생이 지은 ‘역락료’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임이 아니었나 싶다. 원근의 지역에서 병와선생의 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는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즐긴 자리였으니까 말이다. 성리학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음악, 어학, 민속학, 그림 등 병와선생의 학문이 미친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각기 한 분야로만 바라보니 전체적인 모습을 그릴 수가 없었다. 호연정에서 선생의 학문과 저술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모임이 계속되고 성과를 낼 수 있다면, 병와선생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임을 통해 호연정이 다산초당을 넘어서는 지역문화의 자산이자 스토리가 있는 곳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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