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일간신문에서 <‘국제로타리 세계대회’ 개최… ‘윤보선 전(前) 대통령 장남’ 윤상구씨>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4·19 나던 해 대학에 입학하면서 내가 가정교사로 기숙하던 친척 집 동생이 그 당시 서울 재동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그 윤상구 어린이와 같은 학급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4·19혁명으로 우리나라 첫 번째 공화국의 정치체제가 붕괴되고 제4대 대통령인 되신 분이 그 친구의 아버지라면서 안국동에서 청와대(당시는 ‘경무대’)로 이사 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에서 이런 대목이 있다. “5·16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나?”고 한 질문에 윤씨가 대답했다. “새벽에 총소리가 들려 깼다. 그때는 청와대에서 시내가 다 보였다. 멀리서 섬광(閃光)이 번쩍번쩍거렸다. 괴뢰군이 쳐들어왔나 생각했다. 좀 시간이 지나서 ‘청와대로 쿠데타군이 온다’는 말을 들었다. 지프에서 장도영·박정희 장군이 함께 내렸다. 박정희는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들이 현관에서 총을 풀고 안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기억난다.”(2016.5.13. 조선일보). 제2공화국 체제의 대통령 역시 국가 원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다른 시대의 대통령과는 성격이 다른 것은 물론, 내각책임제 국무총리 역시 다른 총리와는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4월 26일, 그러니까 4·19가 난 지 꼭 1주일이 지난 같은 화요일에 “나 이승만은 국회의 의결을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하야성명’을 발표하던 육성을, 불타고 있던 서대문 이기붕씨 집 건너편, 어느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통해서 직접 들었던 기억이 난다. 조병옥 박사가 선거 한 달을 앞둔 2월 15일 급서함으로써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없이 부통령후보 장면 박사만을 내세운 상태였다. 대통령은 연로했고,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이 있었다. 이에 집권 자유당과 정부가 유력 야당 후보를 밀어내고 이기붕 국회의장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자 그해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으로 몰고 간 것이 4·19 학생혁명을 불러왔고, 6월 15일 의원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제2공화국의 헌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당시 정치적 분위기는 대통령제는 독재할 경향이 있고, 의원내각제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의원내각제는 국회의 개헌기초위원회의 결단을 뛰어 넘어, 이미 4·19혁명과 동시에 결단된 국민적 합의로 받아들여졌다. 7월 29일 초대 참의원과 제5대 민의원 총선거가 실시돼 야당이던 민주당이 민의원 233석 중 175석을, 참의원 58석 중 31석을 장악했으며, 나머지 의석은 민의원의 경우 무소속 46석, 사회대중당 4석, 자유당 2석, 한국사회당 1석 및 기타 군소정당 5석 등이었다. 참의원의 경우는 무소속 20석, 자유당 4석, 사회대중당 1석, 한국사회당 1석, 민족진보연맹 1석 등이었다. 중요한 것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정치체제였으므로 정계 실력자들은 서로 대통령보다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민주당 신파에서는 장면 의원을 밀었고, 구파에서는 김도연 의원과 윤보선 의원이 총리 후보 경쟁을 벌였으며, 신구파 협상에서 대통령은 구파가 맡고, 실권자인 국무총리는 신파의 몫으로 결정했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무총리 지명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2일 국회 민?참 양원 합동회의 표결에서 당선된 윤보선 대통령은 협상과는 달리 8월 16일 구파의 김도연 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17일 표결에서 224표 중 가(可) 111, 부(否) 112, 과반수에서 3표 부족으로 부결됐다. 결국 두 번째로 지명된 장면 의원이 19일 표결에서 가 117, 부 107, 무효 1표로 관반수를 획득, 가결됨으로써 내각책임제 하의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로 인준 받았던 것이다. 곡절 끝에 출범한 장면 내각이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구파의 방해가 도를 넘어 정부가 안정되지 못했던 까닭이다. 결국 이듬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앞장 선 군부에 의해 정변이 일어났고, 국군통수권을 가진 윤대통령은 청와대를 찾아온 군인들에게 “올 것이 왔구나!”라며 5·16을 사실상 지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18일 국무위원 전원이 사퇴하고 장면 총리는 명륜동 자택으로 귀가 후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66년 6월 4일 세상을 떠난 장면 박사의 50주기 미사가 지난주 4일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그분의 4남 장익 주교 집전으로 봉헌됐다. 미사를 마치고 유족들과 ‘운석(雲石) 장면총리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장박사 묘소를 찾았을 때 필자도 이사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했다. 짧은 연도(煉禱)를 바친 다음 기념사업회 류덕희 이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50년 전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사기(史記)’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그를 배척했던 바로 그 정부도 백성의 압력에 밀려 국민장 거행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됨으로써 노천에서 대미사를 드리고 종교계와 관·군 대표들을 비롯한 수십만, 아니 백만 시민이 서울운동장에서 애도와 극찬으로 그를 추모했다. 그 중에는 대통령 이름으로 나온, 자신도 신자인 국회의장도 있었고, 불교 큰스님도 나와 고인이 모든 사람에게 보인 관용과 애덕을 기렸다. 살아서 다년간 교회 봉사에 헌신한 이 겸손한 그리스도 신자는, 공생활에 있어 말과 모범으로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온갖 신분의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었듯이, 죽어서도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온 국민을 이렇듯 감화시킨 것이다.” 이 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강영훈 전 국무총리도 지난달 5월 10일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시작한 기념사업의 정신은 이어져 제2공화국과 장면 박사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올바른 이해와 그분의 성덕(聖德)을 기리는 일이 빛을 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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