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한 글감, 주렁주렁 달려 나올 흥미진진한 이야기 소재가 뭐 없을까. 그것을 찾아 눈여겨 살피고 기웃거리는 일이 내 일상의 절반을 넘는다. 금맥을 찾아다니는 광부처럼 나는 끊임없이 나의 이야기 맥을 찾아 발품을 판다. 잠시 여유가 있을 때면 대동여지도를 한방 가득 펼쳐놓고 이리저리 뒤적거리기도 하고 풍속화나 민화도록에 빠져 시공을 넘나들기도 하는가 하면 서재 한 켠에 자리 잡은 향토사를 속속들이 뒤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눈에 확 드는 어느 낯선 누정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혹은 전설을 가득 지닌 고갯마루와 바위를 따라 여행 일정을 잡기도 한다. 이야기 소재를 낚으려 줄을 던지고 흐르는 물을 끌어안는 투망질이다. 그러다 보니 누가 나에게 금맥(?)이 있다는 제보를 해주면 저절로 귀가 솔깃해져 기어이 쫓아 나선다. 지난 초봄, ‘시와 반시’의 발행인 강현국 시인이 좋은 이야깃감을 알려 왔다. 그래서 찾아 나선 곳이 경북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있는 자그마한 목조 건물, 존애원이다. 대청마루하나에 한 칸짜리 방 두 개가 전부인 협소하고 단출하기 짝이 없는 검박한 건물이다. 나는 마을의 외진 들녘 한 귀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의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을 가득 메운 보랏빛 오랑캐꽃과 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가 이곳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찬찬히 살피던 나는 서까래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마른 한약봉지에 눈길이 먼저 닿는다. 감초, 숙지황, 구기자, 백출...순간 나는 400여 년 전의 세상으로 돌아가 이 건물을 찾던 민초들의 병들고 고난에 찬 얼굴을 떠올려 본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 제1주력부대가 짓밟고 지나간 상주는 처참하였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던 경천대는 눈물로 얼룩지고 북천도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 속에 겨우 살아남은 초민들은 전쟁에 시달리고 굶주림에 지쳐있는데 마을마다 역병마저 돌았다. 신음하는 소리가 골목길을 따라 끊이지 않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냄새가 마을 안을 가득 메웠다. 질곡의 7년 전쟁이 끝난 다음 해 1599년 가을, 경상도 관찰사직을 사양하고 고향을 찾은 우복 정경세는 그 아픔의 현장 앞에서 넋을 잃고 만다. 민초들이 힘을 잃고 각박해진 삶을 스스로 체찰한 우복은 생각 끝에 가까운 친구 성람을 찾는다. “성공, 전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네. 온갖 죽을 병이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데 한 두 가지 약초마저도 갖추지 못해 비명에 죽어가니 말일세. 이것을 어찌하면 좋을꼬. 자네는 시서에 더하여 의리에 통달하지 않는가.” “정말 몸서리치리만치 어려운 상황일세. 경임! 자네가 앞 장 서게. 내가 익힌 의술를 보태겠네. 마침 우리들이 결성해 놓은 낙사계 또한 이웃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치 아니할 것일세!” 정경세는 힘을 얻었다. 그 길로 마을 뒤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쉬운 삼거리에 작은 초가를 한 칸 마련하고 큼직한 가마솥을 걸었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깊게 샘을 파고 약탕기도 몇 개 구입해 놓았다. 그리고 사려 깊은 이준이 ‘인의 실천 즉 본심을 지키고 길러 남을 사랑하자’는 의미를 담아 집 이름을 存愛院이라 붙였다. 지역의 사족, 13가의 문중들이 뜻을 모아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병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우복과 성람은 읍성 장터에 나가 급한대로 몇 가지 건재를 주섬주섬 사들였다. 보혈재인 주치와 구기자를 비롯하여 위장에 좋은 백출과 창양치료재인 황기는 물론 갈근을 넉넉하게 구했다. 그리고 뽕나무 뿌리와 누에 가루, 향이 고루 밴 약쑥도 몇 짐 마련했다. 그러자 계원들이 한 두 명의 환자를 업고 들어왔다. 성람이 진맥을 하고 우복은 곁에서 진료 상황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루 이틀을 보내고 달을 보내는 사이에 존애원은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병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審藥 등 지방관서의 의료 능력이 일일이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어려운 백성들에게 존애원은 맘 편히 기대고 찾는 의원이 되어 준 것이다. 무료 병원이던 존애원은 1782년 까지 오랜 세월 동안 계속 되었다. 설립한 세대가 떠나고 그 뒤를 이을 인적 물적 여력마저 충분치 않았으나 결코 문을 닫지 않았다. 존애원은 경노소로, 나아가 서원으로 그 역할이 조금씩 변화해 나가기도 하면서 시대 상황에 맞는 일을 찾아 일제기까지 그 설립정신을 이어왔다. 존애원은 임란기적 시대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상주지역 선비들의 인도주의의 실천이요,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묻고 체휼해 나간 상징이다. 존애원과 같은 이야기 적층이 두껍게 깔린 땅이 진정 강하고 복된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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