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쯤 돼 보이는 정말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순진한 표정으로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부리는 재롱도 예뻤다. 그러나 그 아이가 예쁘게 보인 건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예쁘게 보이지 않은 건 그 아이의 탓이 아니었다. 예쁘고 순진하기만 한 아이를 더 이상 예쁘지 않게 만든 건 그들의 부모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요즘 내 판단의 기준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참 많다. 내가 보고배운 기준과는 너무 다르지만 아무 말도 못한 채 냉가슴만 앓고 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태에서 겪는 문화나 세대 차이라고 하기엔 너무 씁쓸하고 허전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연령에 따라 생각이나 행동이 조금씩 다른 건 맞다. 또 그래야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게 된다. 그렇지만 이 세대 간 차이는 어디까지나 그 사회가 요구하는 약속된 기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은 변하지 않고 이어진다. 미풍양속을 지키고 예절이나 에티켓 등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일반적 상식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이런 개념이나 문화 관습도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손바닥 뒤집듯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여기는 우리나라이지 서양이나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마치 서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늘 처음 서울에 온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일수록 자율이니 사생활이니 하는 개념을 내세우며 튀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내가 그 예쁜 여자이이를 만난 것은 퇴근길 지하철에서였다. 마침 노약자석에 빈자리가 있어 망설이다가 앉았다. 나는 아직 70세가 채 안 됐지만 머리카락은 백발에 가깝게 희다. 나는 평소에는 경로석에 앉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한다. 그러나 이 날은 세 자리가 모두 비어있어 내가 앉아도 될 것 같았다. 자리에 앉고 보니 그 어린 여자이이는 건너편 좌석에 있었다.
좌우엔 그 아이의 부모인 젊은 남녀가 있었다. 그런데 좌석에 걸터앉아 있던 아이가 신발을 신은 채 좌석에 올라서더니 펄쩍펄쩍 뛰면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웃고 떠들다가 전동차 바닥으로 뛰어 내리기를 반복했다. 간혹 전동차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리고 또 좌석에 올라가 아까처럼 깡충깡충 뛰었지만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말도 안했다. 물론 신발을 벗기려고도 안 했다.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가장 큰 교육책임자는 부모일 텐데 이런 행동을 방임하는 것도 자율성 교육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 젊은 엄마·아빠는 이 아이의 행동을 왜 방임할까? 이런 게 아이의 인성과 자율성을 키워주는 것일까?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면 정신발달이 지장이라도 받는단 말인가? 정상적인 부모라면 당연히 아이가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불편을 주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여자아이의 버릇없는 행동은 쉬지 않고 계속 됐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나의 인내력도 한계에 도달할 것 같았다. 그 여자이아에게 ‘얘야, 시끄럽게 소리치면 안 된단다. 신발은 벗고 자리에 올라서렴.’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아이의 부모를 향해 한바탕 소리를 질러줄까? 이런저런 생각만 하는 사이 내가 내릴 역에 열차가 도착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내렸다. 나 역시 비겁하게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에 동조한 것 같아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