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中宗) 25년(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관련 기록이 있으니, 조선중기에는 있었을 법한 이 비(碑)가 현재에는 보이지 않으니, 지금이라도 신녕군 어디엔가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昇爲縣卑)를 찾을 수 있다면, 문화재 환수운동이라도 펼쳐 볼 명분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대해 본다.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紺紙金泥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은 당나라 반야(般若)가 번역한『화엄경』정원본 40권 가운데 권34에 해당하며,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부처의 공덕을 얻기 위해 닦아야 할 10가지 계율을 설법한 보현행원품의 내용이 들어있다. 검푸른 종이에 금가루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으며,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고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6.5cm, 가로 9.5cm이다. 표지에는 금·은색으로 꽃무늬가 묘사되어 있고, 그 중앙에 ‘대방광불화엄경행원품’이라고 금색으로 쓴 제목이 있다. 책 머리에 행원품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금색으로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책 끝의 간행기록에 간행연도가 지워져 있어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지(至)’자로 시작되는 점과 책의 품격으로 보아 고려말인 1341∼1367년 사이에 간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일본에 전래되었다가 되돌아온 것으로 습기로 인해 간행기록 등 몇 곳에 훼손이 있으나 그 외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발원문 즉 쓴 사람 쓴 이유 제작방법 등이 상당히 중요하다.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紺紙金泥 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는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보현행원품』은 화엄경 가운데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보현보살이 설법한 부분이다.2. 「월정사시장경비 (月精寺施藏經碑)」 이 비는 1339년(충숙왕 복위 8) 절에 대장경을 시주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에 이우(李俁)가 편찬한『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탁본의 단편만이 수록되어 있다.『대동금석서』에는 이제현(李濟賢, 1287∼1367)이 비문을 짓고 종고(宗古) 스님이 글씨를 썼다고 명기하고 있지만 현재 볼 수 있는 탁본 일부만으로는 이러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음기] (장경비문 내용)所生幷三名供其使令田七十(결락)/ 소생이 모두 3명인데, 각기 부리게 하고,밭 70…信安公李公安壽以聞(결락) / 신안군 이안수가 듣고서…白金二鋋又入廩祿歲(결락) / 백금 두 덩어리를(시납하고) 다시 봉록을 시납하였다. 해마다…會衆五千指 己卯之會(결락) / 대중을 모으니 5천을 헤아렸다. 기묘년의 모임에…相國金夫人洎信安李(결락) / 재상의 김씨 부인과 신안 이공 …(『한국금석전문』 중세 하(下), 1984)요약하면 1,339년 월정사에 장경 봉안하는데 왕비가 백금을 하사 하였고, 원나라에서 환관을 지냈던 신안군 이방수도 백금 두 덩어리를 시주하였으며 당시 재상의 부인 김씨 등도 여기에 동참하였다는 내용이다. 장경의 봉안법회[己卯之會]에 5천 명의 대중이 모였다는[會衆五千指] 한다.3. 월정사에서 사시장경비에 대하여 문제제기 이 법회(己卯之會)는 施藏經 碑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대장경으로 해석하는데, 월정사의에서 대장경 법회인가 하는 점에서는 개인적 의문을 가진다.◆ 위의 조선 현종때 이우의 대동금석서 중에 ‘월정사사시장경비(月靜寺施藏經碑)“는 1,339년(고려) 이제현이 쓴 기록으로 그 내용은 원나라에서 환관을 지냈던 신안군(信安君) 이안수(李安修)도 백금 두 덩어리를 시주하였으며 당시 재상의 부인 김씨 등도 여기에 동참하였다는 내용이다.(원문; 信安公李公安壽以聞).◆“월정사사시장경비(月靜寺施藏經碑)”연구일부에서는 월정사사시장경비의 藏經이란 용어에 의해 팔만대장경을 봉안하였기에 예전에는 큰 가람이 있었어야 했다. 또는 팔만대장경은 많은 물량이기에 여러 사찰에서 나누어 조각했을 것이란 갖은 억측들이 난무한다.그런데 팔만 대장경은 초조대2장경이 1,232년(고종 19)에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자 이후 재조대장경 사업에 착수하여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조판(組版)이란 활판을 만들어내고, 판각은 남해군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판각하였다. 즉 팔만대장경의 제작시기는 고종 23(1236)에서 고종 38년(1251)에 16년동안 완성하였다.그러면 이제현이 “월정사시장경비” 쓴 기록은 1,339년으로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1,251년과는 8~90년 시간 차이가 있기에 이러한 대역사를 완성하고 80년 시간의 공백에 대장경 봉안의 약사보고도 없이, 이제현은 “信安公李公安壽以聞”만 기록하였다는 내용은 비문의 맥락이 맞지 않고, 또한 “월정사사시장경비”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고 지정하지 않았고, 다만 장경(藏經)이란 용어 때문에 팔만대장경으로 비약하는 것은 이해가 곤란하다.藏經이란 경전(經)을 藏(감추어 봉안하다)란 뜻이다. 1,970 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해체 정비공사 시 탑내에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월정사 사시장경비”란 월정사팔각구층석탑 내에 경전을 봉안(藏)하는 예식으로 사료한다.월정사는 강릉에서 대관령(선자령)을 넘는 도보로 이틀, 개성에서는 6~7백여리로 도보로는 하루 3~4십리 길이다(야간에는 호랑이의 위험으로 이동을 금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관찬지등에서 보면 강릉대도호부는 인구가 28,000명 이었으며,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장경 봉안법회는 상당한 규모로 전국적인 행사로 이해된다. 그러면 월정사에서 이러한 대규모의 봉안법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추정하여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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