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천 신녕면 매양리 이성근(李成根, 19세) 스님을 아십니까?- 영천 화산면 매산리 박창호(朴昌鎬, 19세) 스님을 아십니까?- 1982년에 대구 보현사 법당이 영천 야사동 용화사로 이건- 법당 탁자에서 1919년 조선독립신문 ·1919년 국민회보 등사본 발견- 영천 출신 2명의 스님이 태극기를 만들던 용화사 법당
제106주년 3.1절이 약 10여일 지났다. 그날의 하나 된 외침은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일제에 강제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며 목숨 걸고 투쟁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기며 뜻 깊은 희생을 기리고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고자 3.1운동 정신을 되새긴다.이러한 정신을 되새기려 노력하는 곳이 지역에도 있다. 영천 야사동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용화사(주지 지봉)이다. 용화사는 영동고등학교 뒤편에 후문에 위치한 곳으로 대구 KBS 방송국 2022년 8월 12일 “지역의 사생활” 동화사 스님들의 만세운동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덕산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내용이 방송되었다.1919년 3월 28일 허선일(許善一, 23세), 권청학(權淸學, 21세), 김종만(金鍾萬, 21세), 이기윤(李起胤, 21세), 김문옥(金文玉, 20세), 김윤섭(金潤燮, 20세), 이보식(李普湜, 20세), 이성근(李成根, 19세), 박창호(朴昌鎬, 19세) 등 동화사 학림 학생 스님들은 동화사 심검당에 모여 만세운동 동참을 결의했다. 이 운동에는 영천 신녕면과 화산면 출신의 두 스님이 있다.덕산정시장 장날인 30일을 하루 앞둔 29일에 이들은 반월당 언덕에 있는 동화사 포교당(현재 보현사)에 모였다. 이들은 포교당에서 이튿날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쯤 덕산정시장에는 독립을 외치는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학림 학생들은 물론 장날을 맞아 시장을 찾은 일반 민중들과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태극기는 긴 장대 끝에 달려서도 펄럭이고, 사람들의 손에서도 힘차게 나부꼈다.일본 경찰이 긴급 출동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경은 총칼을 휘둘러 군중을 해산시키는 한편으로 주동자 10여 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윤학조, 허선일, 권청학, 김종만, 이기윤, 김문옥, 김윤섭, 이보식, 이성근, 박창호 등 10명 스님은 만세운동 참가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1일 구류되고, 4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기소되었다. 같은 해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에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그러나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0년에 10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라 고시하고 있다.용화사 법당에서는 태극기를 만든 기록과 함께 1982년 대구에서 영천 용화사로 이건 될 때, 이 법당의 불단에서 나온 조선선종경북포교당(朝鮮禪宗慶北布敎堂) 사찰 직인과 대구부 덕산정 62번지 2호 조선선종경북포교당의 주소 압인이 찍혀 있는 조선 1545(가정28)년 유점사개간 ‘선문염송집’의 고서(古書) 속에서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신문 창간호과 국민회보 창간호가 한 장의 종이에 등사되어 이 책속에 숨겨져 발견되었다. 두 신문은 한 장의 종이에 등사되어 발행한 것으로 보아 3·1운동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등사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크기는 세로 22.0㎝, 가로 31.4㎝로 A4 용지 크기보다 조금 큰 사이즈 종이에 국한문이 혼용되어 등사됐다.그 동안 잘 알지 못했던 영천 신녕과 화산 출신의 이성근(李成根, 19세), 박창호(朴昌鎬, 19세) 두 스님의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이 담겨있는 법당으로 현재 영천시 야사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매년 3월 30일이면 추모의식이 거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