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녕>백학서원(白鶴書院)399)1. 화산지 백학서원은 신녕현 동쪽 30리 지점의 능산(陵山)의 아래 오도리(吾道里)에 있으며 본래 서기1552년에 세워졌다.(금계 황준량공께서 신녕 현감 재임시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백학산의 아래 양강의 위에다 서당을 건축하고서, 여러 차례 도산의 이 선생에게 질문하여 절목(節目)을 상정(詳定)하고 그 서당의 이름을 청하자 선생께서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였고, 그로 인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게 되었다) 임진년(1592년)에 병화(兵火)로 불타 임자년(1612년)에 중건하였으며, 효종조 무술년(1658년)에 땅이 협소하고 위치가 궁벽하여 이곳 능산 아래 오도리로 옮겨 세웠으며, 숙종조 무오년 (1678년) 서당을 서원으로 하고 사당(祠堂)은 ‘상덕(尙德)’ 강당을 ‘전교(典敎) 누각을 `풍영(風詠)`이라 하였다. 고종조 무진년(1868년)에 훼철(毁撤) 되었다가 경자년(1900년)에 다시 서당(書堂)으로 세웠다.2. 풍영정 일고(권응도(1616~1673년. 안동권씨 휘 덕시의 차자. 생원.호풍영정)의 백학서원 이건 상량문(1658년 소작) (중략)새로운 터를 골라 옮겨 세우니 서원의 규모 이미 이루어졌고, 옛 제도를 따라 고치니 강학(講學)의 당우(堂宇)가 이에 만들어졌네. 긴 들보 밝은 날에 들어올리니 제비들이 두루 청금(靑衿)을 축하한다. 그윽이 서원을 경영하던 처음을 생각해보니, 지난날 국가가 밝았던 때였었지. 금계께서 스스로 지은 시 귀는 벽 사이에서 아름다운 옥처럼 찬란하며, 퇴계선생의 친필로 쓰신 아름다운 편액은 문미위에서 은고리로 빛난다. 얼마나 우리 사림들의 긍식(矜式)이 많았던가? 다행히 후학을 가르치는 곳(藏修)이 되었네. 비록 왜란에 불타긴 했지만, 여러 사람의 의논에 의해 다시 세워짐을 축하한다. 유풍(遺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극한 가르치심 더욱 커지리. 존심주경(存心主敬)이라는 말씀을 외우면, 으슴프레함이 마치 얼굴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듯하며, 옥간풍대(玉間風臺)의 시 귀를 완상하면 흡사 시를 읊으며 돌아오심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제사를 드리는 예에는 마땅히 수호(守護)의 길이 넓어야겠지만, 그러나 국내(局內)가 좁은데다 하물며 산허 리의 토질이 좋지 않아 묘우(廟宇)를 세우고 재사(齋舍)만들기에 불편하며 위토(位土)와 우물은 바라지도 못 함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