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장군면 대교리 산 45번지에 가면 조선 초기의 재상으로 단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김종서(1383(?)~1453) 장군의 묘가 있다. 그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한 후 주로 지방의 민정을 살피는 감찰직을 맡아보다 세종에게 큰 신임을 받아 함길도 도절제사와 형조, 예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세종 16년(1434)에 북방의 6진을 개척하여 국토 확장의 위업을 이룩함으로써 현재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그의 별명이 큰 호랑이(대호)였으니 북방의 여진족에게는 분명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세종은 “북방의 일은 김종서가 있어도 과인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과인이 있어도 김종서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하면서 김종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장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분명 문신 코스를 밟았기에 훌륭한 행정 수완과 더불어 학문적 조예가 깊어 <고려사>와 <세종실록>의 편찬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세종 사후 문종 즉위년에는 의정부 좌찬성이였다가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고 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와병으로 사직하자 좌의정이 되면서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단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으로 어린 왕을 보필하다가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300여 년이 지난 영조 22년(1746)이 되어서야 사육신과 함께 관직이 복구되어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가 있는 곳은 원래 공주시 장기면이었으나 2012년 세종시에 편입되면서 장군의 묘가 있는 곳임을 알리기 위해 행정구역이 세종시 장군면으로 바뀌었다. 이 묘소에는 당시 그가 역적으로 죽게 되어 시신을 전부 수습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만을 이곳에 묻었다고 전한다. 2019년에는 묘소 앞에 충익사를 건립하였고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전통 제례에 따라 절재 김종서 제향 행사가 개최된다. 이곳의 산세는 이 묘소의 주산인 연기면 수산리 국사봉(214.6m)에서 동남쪽, 다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내려와 묘소 뒤편에서 한 번의 과협을 하고 그 아래에 장군의 묘소가 있다. 주산은 단정하고 혈장 좌우의 청룡과 백호도 나름 갖추어져 있어 혈장의 생기를 잘 갈무리해주고 있다. 이곳의 수세는 우선룡에 좌선수로 합법하고 특히 우측 백호 자락 넘어 대교 저수지에서 나오는 율곡천은 이 묘역의 암공수(暗拱水)가 되어 혈장의 생기를 한 번 더 가두어 준다. 그래서 풍수서 『인자수지』에서도 “명조불여암공(明朝不如暗拱)”이라 하여 보이는(明朝) 물길이 암공(暗拱)만 못하다고까지 하였다. 그런데 점혈에 있어서 이 묘소는 용이 아직 행룡하고 있는 과룡처에 써져 있어 이러한 곳은 지기맥이 그냥 통과해 버리는 장소다. 풍수에서는 계수즉지(界水則止)의 원칙에 따라 용이 끝나는 용진처(龍盡處)에서만 혈이 맺힌다. 이곳이 만약 과협에서 비룡입수여 돌혈로 혈장이 맺어졌다면 현재의 위치가 정확할지 모르나 이곳은 그냥 쭉 뻗어 내린 유혈의 혈장이다. 풍수에서는 용이 그냥 통과해 버리는 장소를 과룡지장삼대내절향화(過龍之葬三代內絶香火)라 하여 이런 곳은 후손이 귀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