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35)“곧 모시러 갈 겁니다. 마을 입구로 나와 주십시오. 저번에 말씀드린 범인식별 참고인으로 수고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결코 부담 느끼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식별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받은 깡마른 여자는 허둥대었고,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곧 평정을 찾아 샤워를 했다. 생각해보니 따분하고 무료한 일상에서 잠시 탈출할 수 있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절호의 기회였다.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재미있는 놀이의 한복판을 걸어들어 가기 위해 수수한 옷으로 연출했다. 신상명세가 확실히 보장된다는 전제하에 괜히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마을 입구까지 나가는 들길에서, 저토록 찬란한 들꽃을 밟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저 꽃봉오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버티다가 마침내 만발한 들녘에 선물처럼 안겨준 들꽃 세상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온 세월이 억울했다. 다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시간들이 엉켜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엉망만 아니라면, 조금 가치 있는 날로 손꼽아 보는 것도 바람직했다. 옆에 동행자가 있기라도 하듯 왼발에서 오른발로 옮겨가며 발맞추기도 해보았고 아무 말이나 뱉으며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찰관을 보았고,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원위치 시켰다. 이 표정이, 깡마른 여자가 줄기차게 세상과 맞장 뜨는 최상의 중심처럼 다들 느꼈으면 하고 소원한 적도 있었다. 그다지 웃지 않았고, 그다지 찡그리지 않으면서 변화 없는 표정 속에 굳은 채로 살아온 셈이었다. 간혹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속에서 키득 거리던 조약돌 같은 시간을 제외한다면, 누가 봐도 싸늘한 인형과 닮아있다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경찰서에 도착하여 취조실 다른 방에서 범인을 기다렸다. 이쪽과 저쪽의 차이는 볼 수 있고 없고의 차이일 것이다. 한 명의 용의자만을 제시하여 범인인지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는 것은 기억의 왜곡이나 부당한 인상에 따라 부정확한 범인 지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외관이 비슷한 가짜 용의자들과 섞어서 일렬로 줄 세워 놓는다고 했다. 기억해 의존해서 외모나 걸음걸이나 느낌이 비슷한 범인을 지목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목격자에게 수사기관이 의심하고 있는 진짜용의자가 누구라는 점이 암시되어 전달된다면 범인식별의 정확성이 감소하기 때문에 형사들은 깡마른 여자의 무덤덤한 표정이 고맙다고 느끼고 있었다.다섯 명의 용의자가 나란히 줄을 서서 취조실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한사람이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목격자를 통해 확실히 해두고 싶은 심증에서 깡마른 여자의 지목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형사의 구령에 맞춰 한 바퀴를 돌려세워진 다섯 명은 하나같이 억울한 표정이었다. 쉽사리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듯 했다. 그날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양미간을 찡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작은 집중 변화덕분인지 한사람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혹시 범인의 윤곽이 잡히지 않으면 가장 범인 아닌 사람으로 한사람씩 제외시킵시오. 그러다보면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유력한 범인입니다.”속눈썹이 긴 형사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자신이 지목한 범인을 마음에 담아두고 다른 마음 빈자리에는 속눈썹 형사를 담아두면서, 공기놀이하듯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저쪽부터 1번입니다. 몇 번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형사에게 마음속에서 6번을 달아준 뒤 하마터면 6번이라며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참고 침을 꿀꺽 삼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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