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여자(21)그해 유월, 깡마른 여자는 참으로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무심히 스치는 유월 바람의 줄기 따라, 자호천 바닥을 훑듯이 흐르는 무수한 별빛이 물결에 섞여 서로의 음성을 먹고 있었다. 한번쯤 제 목소리를 주장할 만도 한데 어쩜 저리도 서로를 양보하고 있을까. 별빛은 별빛대로, 물결은 물결대로 불편한 기색 없이 단지 도도하게 흐를 뿐, 눈을 뜬 밤벌레만 자욱했다. 풀잎은 스치며 드러눕고, 척박한 땅에도 홀씨들이 바쁘게 파고들었다. 한 계절은 한 계절을 배웅하거나 마중 나와 있었다. 지하실 통로를 빠져나와 부실한 나무문짝을 힘겹게 밀어 맞춰놓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허물어지는 나무문짝이 눈에 들어왔다. 깡마른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새여 나왔다. 저 세월을 살았구나. 여위어가며 허물어지는 나무문짝의 남루한 역사에 알지 못하는 연민이 느껴졌다. 저러다가 돌멩이처럼, 진흙처럼, 모래알갱이처럼 가난하게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인부를 사서 새로운 문짝을 달기보다는 애기똥풀처럼 버려두면 제격이라 생각했다. 너무 깊고 어둡지 않게 산짐승도 들짐승도 다녀가도록 항시 열려있는 지하실 통로로 자리매김하고 싶었다. 왠지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디선가 기차의 기적소리가 밤하늘을 뚫고 들려왔다. 모래사장을 지날 때 낯선 움직임이 발걸음을 세웠다. 놀랐지만 새로웠다. 귀를 모았고 눈을 모았다. 목표물이 멀리에서 통통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깡마른 여자를 의식하지 못한 전진이었다. 덩치가 크다면 위협적인 요소로 불안감을 느꼈을 건데 다행히 두 개의 손바닥을 펼쳐놓은 크기였다. 어둠 속이였지만 육안으로 확인되는 십 미터 앞에서 생명체가 멈췄다. 토끼였다. 밤길에 방향을 잃고 모래사장 안에서 당황한 뜀박질 같았다. 달빛에 반짝이는 모래사장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어쩌면 자의로 선택한 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깡마른 여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화려한 장면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 자호천을 매개로 토끼주위를 날고 있었다. 눈물이 고여 들었다. 마치 하늘의 어둠과 땅의 어둠이 서로를 만나는 교차점에서,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반딧불이라 각인하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와락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어떻게, 오래전부터 준비해둔 것처럼 하나같이 깡마른 여자를 반겨준다 말인가. 지하실 통로로 드나드는 허접하고 나약한 자신을 내치지 않는 이 세상은 뭐란 말인가. 몇 번의 자살에서 살아남은 패배자를 향한 배려인가. 모래사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토끼의 뜀박질이 반딧불이를 자극했을 것이다. 풀숲 사이에서 유순하고 나직하게 날아오려는 날갯짓은 이미 접고 말았던 것도 같았다.반딧불이에게 토끼의 뜀박질은 서두르라는 외침이 되었고, 어둠속에 잠긴 빈 하늘을 채우라는 명령이 되었다. 불을 싣고 날아오르는 꼬리는 하늘만큼 열리고, 깡마른 여자에게 속속 희망을 노래해주었다. 세상과 맞서기를 주저하던 어제의 자신을 돌려세워 당당하게 현관문으로 나가서 견고한 벽을 허물고 싶었다. 토끼는 얼마쯤에서 멈춰 멈칫거렸다. 인기척에 놀란 몸짓이었지만 왔던 길을 돌아갈 생각 없이 빨간 눈동자만 빠르게 굴리고 있었다. 뒷걸음으로 막힌 길을 뚫어주고 싶었다. 두서넛 걸음을 뒷걸음으로 물러서자 토끼는 재빠르게 옆길로 달음박질쳐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모래사장은 선명하지 않는 토끼 발자국으로 가득했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럴 때면 모래알갱이도 시침을 뚝 떼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었다.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허공에서 두 팔을 벌려 생명의 존엄함을 경청하고 목도했다. 유복한 어둠이 반딧불이를 향한 절대적 애정을 드러냈고, 속살을 찾은 날갯짓은 거기에서 멈췄다. 자호천은 다듬고, 쪼개지고, 흐르고, 파고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