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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통의 보통글밥 ] 책 박스를 기다리며 ①
심 지 훈
(경북 김천, 1979.7.8~)
경북동부 관리자 기자 / d3388100@hanmail.net입력 : 2023년 11월 08일(수) 17:23
ⓒ 경북동부신문
1.
며칠 전 도착한 소설가 우한용(서울대 명예교수) 선생님의 신간 <왕의 손님>은 평설(評說)부터 읽기 시작했다. <왕의 손님>은 세태와 맞지 않게 “오탈자가 발견됐다”는 이유만으로 초판본을 전량 수거해 파쇄한 뒤 재판을 찍은 책이다. 
나는 재판본을 우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내가 평설을 먼저 읽은 까닭은, <우한용 선생님의 소설*>은 거개가 오징어땅콩을 우저적대며 시간 죽일 양으로 드러누워서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평설에 재판 찍게 된 사연이 좀더 오밀조밀 소개돼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나는 우한용 선생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언론사 상식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언론사 상식시험은 범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복불복인 경우가 많다. 우 선생님의 소설이 쉽게 읽히지 않는 까닭은 해박함과 정확함 그리고 정밀함이 두루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소설은 경탄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다.
평설은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정정호 선생님이 맡으셨다. 두 분은 서울대학교 동창생으로 우 선생님은 국어과를, 정 선생님은 영어교육과를 나오셨다.
정정호 선생님은 이번 평설을 ‘특별히’ 읽기 형식으로 쓰셨는데, “나는 무슨 글을 읽든지 읽는 과정에서 “인용할 만한” 구절이 있는가를 찾는 버릇이 있다.”며 “인용을 옹호하는 논리를 소개”한다. 
“현대 영국 소설가 C.S. 루이스(1898~ 1963) 소설에 등장하는 인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멋진 문구를 거추장스러운 문맥에서 뽑아내는 능력이야말로 인간과 짐승,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별해내는 핵심이오.(C.S 루이스 ‘순례자의 귀향’ 홍종락 옮김, 114쪽)”
*문장이 좀 이상한데, ‘…소설은 인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도가 어떨까 싶다. 
“18세기 영국 대문인 새뮤얼 존슨(1709~1784)은 제임스 보스웰이 쓴 『존슨전기』(1792)에서 “인용은 좋은 것”이라고 전제하고 “인용에서 여러 마음의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고전을 인용하는 것은 전세계 문인들의 구체적인 언어행위이다.”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왕의 손님> 379쪽
정 선생님이 <왕의 손님> 에서 인용한 글귀 중에 이 대목이 유독 눈에 띈다. “우리 시대는 정연한 내러티브로 정리가 안 되는 게 특징이다.”<왕의 손님> 36쪽

그 아래 우 선생님이 재판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이어진다. “우공(우한용 선생님의 호·愚公)의 이번 소설집은 자의식이 병적으로 강한 소설가의 반성소설(reflexive novel)에 다름아니라는 점이 스스로 판명되는 장면이다.” <왕의 손님> 356쪽

평설을 몇 쪽 더 읽어내면 “소설가 우공은 “허접한 작품”을 써내지 않기 위해 자기 소설에 대한 엄격한 자기검열을 다짐한다.”는 대목도 나온다. 
<왕의 손님> 363쪽 

소설 속에 우 선생님의 작가정신과 창작론이 깊숙이 흘러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고, 이 때문에 ‘오탈자 발견’은 필연적으로 재판의 사유가 됐을 것이다.

2.
각설하고 정정호 선생님이 행하신 대로 나 역시 ‘인용의 미덕’을 살려 세태에 관한 장광설(長廣舌)을 내놓으려 한다.
우한용 선생님이 <왕의 손님> 36쪽에서 밝힌 “우리 시대는 정연한 내러티브로 정리가 안 되는 게 특징이다.”의 전후 맥락은 이렇다.
“소설의 울타리는 늘 흔들려왔다. 소설에 정석이 없는 셈이다. 이는 시대를 따라 소설의 양태가 달라져왔다는 뜻이다. 시대를 따른다는 것은 소설이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써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현실이 문제가 되고, 문제되는 현실을 소설로 이끌어들일 때 소설의 정석은 흔들린다.”
이것이 전(前)의 맥락이다. 후(後)의 맥락은 이렇게 이어진다. 
“소설이 소설 자체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를 소설의 자성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가 소설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한 사색의 편린을 소설형식으로 제안한 것이 ‘가라지를 위하여’이다.(36쪽)”
우리 시대의 특징을 적실하게 표현한 문장은 전의 맥락과 후의 맥락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나는 왜 이 문장만을 쏙 뽑아들었는가.                             (계속)


 교열기자 이진원이 쓴 <우리말에 대한 예의>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한글맞춤법 제11항은 “한자음 ‘랴, 려, 례, 료, 류, 리’가 단어의 첫머리에 올 적에는 두음법칙에 따라 ‘야, 여, 예, 요, 유, 이’로 적는다”라고 돼 있다. 그래서 ‘량심, 력사, 룡궁’ 대신 ‘양심, 역사, 용궁’으로 쓰는 것이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具論會, 金龍洙, 田麗玉”은 모두 ‘구론회, 김룡수, 전려옥’이 아니라 ‘구논회, 김용수, 전여옥’으로 쓴다.” 332쪽

 “반대로, 이름 첫 자가 아닐 경우에는 원래 소리대로 불러야 한다. ‘金德龍, 李厚洛, 鄭淸來’를 ‘김덕용, 이후낙, 정청내’가 아니라 ‘김덕룡, 이후락, 정청래’로 써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응노’도 ‘이응로’가 옳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당연히 ‘이응로’로 올랐다. 그런데도 ‘이응로 서예전’이 열리는 곳을 그들 스스로 ‘이응노미술관(*)’이라고 한다고 한다. 맞춤법도 법인데….” 333쪽
 *이응노미술관은 대전에 있다. 포털을 검색하면, 말법과 무관하게 ‘이응노미술관’으로 안내돼 있다. 

 고유명사로 ‘이응노’라고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겸양한 학자’인 교열기자 이진원은 이런 생각도 바로잡아 준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교열자란, 천재의 붓에 한층 광채를 곁들이는 데 능란한 겸양한 학자이다”고 찬양한 바 있다.
  
““이름은 고유명사이니 본인이 원하는 대로 써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하는 질문이 있었다. 물론 그런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런 예외를 인정하면 말글살이가 혼란스러워진다. 게다가 되레 당사자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金利龍’이란 이름에 두음법칙을 적용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면 규칙성이 없어져서, 본인이 말해 주기 전엔 ‘김이용, 김이룡, 김리용, 김리룡’ 가운데 어느 게 맞는 이름인지 알기 어려워진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게 복불복이라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334쪽

 이어지는 문장이 ‘겸양한 학자’의 적확한 지적인데, 들어보자.

 “사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써줘야 한다’는 말은 ‘본인이 원하는 표기를 모를 땐 제대로 된 표기를 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이게 말이 될 법이나 한 말인가?” 334쪽

 이 때문에 한글맞춤법 제11항에는 한 가지의 허용규정과, 한 가지의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

 ‘외자로 된 이름을 성에 붙여 쓸 경우에 본음대로 적을 수 있다.’(허용) 

 이에 따라 ‘申砬, 崔麟, 河崙’은 ‘신립 최린, 하륜’으로 적을 수 있다.
*한때 ‘柳成龍’을 ‘류성룡’이 아닌 ‘유성룡’으로 쓸 수 있다고 논란이 인 적이 있다. 두음법칙을 잘못한 적용한 결과로, 이는 바루어졌다. 한편 대구한국일보 대표가 유명상(劉命相) 씨인데, 모금도 류(劉) 자를 성씨로 사람들은 모두 ‘유’ 자로 표기한다. 이는 족벌체제가 낳은 기형이 아닌가 싶다. ‘류성룡’이나 ‘류명상’이나 모두 ‘류’로 표기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적는다’가 아니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신입, 최인, 하윤’으로 쓰는 게 원칙이라는 뜻이다.

 ‘한글맞춤법 제11항이 한자음에 관한 규정이란 것은 결국 순 우리말이나 외래어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예외)

 때문에 이루마, 이루다, 이루지, 이로운, 유리해, 주리라 같은 순 우리말 이름은 문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우한용 선생님이 진단한 우리 시대의 특징과 한글맞춤법 제11항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1998년 외환위기 때 소설 <아버지>로 대박을 터뜨렸던 김정현 씨가 경주 무덤 발굴을 모티브로 쓴 <황검보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매일신문 서울정치부장 직을 내려놓은 뒤 경북 안동에 터를 잡고 유기농비료를 만들어 팔면서 출판사 사장과 작가, 강연자, 칼럼리스트 등 다역을 소화해내고 있는 서명수 선배는 신간 <천년의 기억, 우리들의 경주>에서 “우리 국민의 DNA는 신라에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는데, 김정현의 <황검보검> 92쪽은 서명수 선배가 말한 자랑스러운 유전자와의 모순(矛盾)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순이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실체이지 않을까, 나는 그리 파악한지 오래다. 그 모순되는 대목을 읽노라니, 유명연예인 박수홍과 그 부모 간 치떨리는 싸움행각, 짝짓기 프로그램 <나는솔로다>의 돌싱특집 출연자 ‘영숙’의 인간 망종적 언행, 이준석과 안철수의 같잖은 쟁쟁거림, 하루가 멀다 하고 튀어오르는 인면수심의 엽기적인 사건사고들, 무엇보다 너무나도 태연자약해서 너무나도 절망적인 기하급수적인 청소년 범죄들… 이런 것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상식(常識)이 깨지고 의문시 않던 근본(根本)이 무너졌음을 심각하게 목도한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시대의 관념(觀念)들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도 유효하지도 않다고 체감한다. 관념 근본 상식은 한 사회의 정신을 지탱하는 근간일진데, 이것들이 저 극지방 빙하 녹듯 우르르 허물어져 깨져버렸다는 것은 한 국가의 명운이 다한 것인진데, 아!(계속)
/심보통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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